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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견시집주 6
저자 황정견 역자/편자 박종훈, 박민정, 이관성
발행일 2024-08-15
ISBN 979-11-5905-920-9 (94820)
쪽수 493
판형 152*223 양장
가격 3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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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다운 시가 시대, 그 중심에 있던 황정견

송나라는 개국(開國) 왕조인 태조부터 인종조(仁宗朝)를 거치면서 만당(晩唐)·오대(五代)의 장기간 혼란했던 국면이 정리되어 나라가 안정되었고, 백성들의 생활환경 또한 비교적 안정을 찾게 되었다. 전대(前代)의 가혹했던 정세가 완화됨에 따라 농업이 급속도로 발달하였고, 안정된 농업의 경제적 기초 위에서 상공업이 번창하고, 번화한 도시가 등장하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전대에 비해 상당한 풍요를 구가하게 되었다. 이처럼 사회 전체가 안정되고 발전함에 따라 일반 백성들은 단조로운 것보다 복잡하고 화려한 것을 추구하게 되었다. 시대적·사회적 환경은 곧 문학 출현의 배경이고, 문학은 사회생활이 반영된 예술이라고 할 만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유협(劉勰)이 “문학의 변천은 사회 정황에 따르다[文變染乎世情, 興廢繫乎時序]”고 한 것처럼, 사회의 각종 요인은 문학적 현상을 결정하기 때문에 이러한 요소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문학 풍조의 변혁을 동반한다. 송초 시체(詩體)의 변천은 이러한 사실을 보여주는 객관적인 증거이다. 특히 송대에는 일찍부터 학문이 중시되었다. 이는 주로 군주들의 독서열과 학문 제창으로 하나의 사회적 풍조로 자리 잡게 되어 송대의 중문중학(重文重學)적 분위기가 마련되었다. 

황정견은 바로 이때 전성기를 구가하여 북송(北宋)을 대표하는 시인이다. 중국시가의 최고 전성기라 할 수 있는 당대(唐代)를 뒤이어 등장한 북송의 시인들에게는 당시에서 벗어난 송시만의 특징을 만들어 내야 하는 일종의 숙명이 있었다. 이러한 숙명은 북송 초 서곤체에 의해 시도되었으며 북송 중기에 이르러 비로소 송시다운 시가 시대를 풍미하기에 이르렀다. 황정견이 그 중심에 있었다. 

 

후대까지 영향을 미친 황정견의 시론

황정견은 시를 지을 때 시의 표현을 다지고 시법을 엄격히 지켜 한 마디 한 글자도 가벼이 쓰지 않았다. 황정견은 수많은 대가들을 본받으려고 했지만, 그중에서도 두보(杜甫)를 가장 존중했다. 황정견은 두보 시의 예술적인 성취나 사회시(社會詩) 같은 내용 측면에서의 계승보다는, 엄정한 시율과 교묘(巧妙)한 표현 등 시의 형식적 측면을 본받으려 했다. 황정견 시론의 요점을 정리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시의 조구법(造句法)으로서의 환골법(換骨法)과 탈태법(奪胎法)이다. 이에 대해 황정견은 “시의 의미는 무궁한데 사람의 재주는 한계가 있다. 한계가 있는 재주로 무궁한 의미를 좇으려고 하니, 비록 도잠과 두보라고 하더라도 공교롭기 어렵다. 원시의 의미를 바꾸지 않고 그 시어를 짓는 것을 환골법이라고 하고, 원시의 의미를 본떠서 형용하는 것을 탈태법이라고 한다[詩意無窮, 而人才有限. 以有限之才, 追無窮之意, 雖淵明少陵, 不得工也. 不易其意而造其語, 謂之換骨法. 規摹其意而形容之, 謂之奪胎法]”(『시인옥설(詩人玉屑)』)라고 한 바 있다. 이로 보건대, 황정견이 언급한 환골법은 의경을 유사하게 하면서 어휘만 조금 바꾼 것을 일컫고, 탈태법은 의경을 변형하여 사용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진부한 표현이나 속된 말을 배척하고 특이한 말과 기이한 표현을 추구했다. 구체적으로는 술어를 중심으로 평이한 글자를 기이하게 단련(鍛鍊)시켰고 조자(助字)의 사용에 힘을 특히 기울였으며, 매우 궁벽하고 어려운 글자를 사용했고 기이한 풍격을 형성하기 위해 전대(前代) 시에서 잘 쓰지 않던 비속(非俗)한 표현을 시어로 구사하여 참신한 의경을 만들어내곤 했다. 

셋째, 전고(典故)의 정밀한 사용을 추구했다. 이는 황정견 시론의 “한 글자도 유래가 없는 것은 없다[無一字無來處]”와 연관된다. 강서시파는 독서를 중시했는데, 이것은 구법의 차원에서 전대 시의 장점을 수용하기 위한 것이지만, 이는 전고의 교묘(巧妙)한 활용이라는 결과로 표현되기도 했다. 그러면서 전인의 전고를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자신의 의도에 맞게 변용했다.

이와 같은 황정견의 창작법에 대해 부정적 평가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 평가는 황정견 시의 파급력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황정견을 중심으로 한 강서시파가 당대(當代)는 물론 후대 및 조선의 문인들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황정견의 시를 세밀히 소개하다

황정견은 현존하는 가장 공신력 있는 중화서국(中華書局)본에 따르면 총 1,916수의 시 작품을 남겼다. 북경(北京) 중화서국(中華書局)에서 2007년에 출간한 전 5책의 『황정견시집주』에는 총 1,260제(題) 1,916수(首)의 시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황정견 작품의 구절 및 시어(詩語) 하나하나가 갖는 전례와 창작배경 그리고 구절의 의미 및 전체적인 의미를 상세하게 주석을 통해 소개해, 황정견 작품의 세밀한 이해를 돕고 있다. 이 책에서는 『황정견시집주』에 소개된 모든 주석을 꼼꼼하게 번역하였으며, 주석의 내용을 시의 자구(字句) 해석에 최대한 반영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황정견 시가 워낙 난해하여, 경우에 따라서는 주석이 시 본문과 어떤 연계성이 있는지조차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이러한 경우에도 연결 관계를 최대한 찾아 시 본문 번역에 녹여내고자 노력하였다.

황정견에 대한 연구는 지금까지 꾸준히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아직까지 황정견 시 작품에 대한 전체적인 번역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구체적인 실상의 일면만을 위주로 하거나 혹은 피상적으로 연구가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이에 상세한 주석을 통해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돕는 『황정견시집주』에 대한 완역은, 부족하나마 후학들에게 황정견 시를 이해하기 위한 초석을 다지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해제

황진시집주서

 

황정견시집주

산곡외시집주

서문

향실 사씨가 산곡외집시에 주한 것에 쓴 서문(薌室史氏注山谷外集詩序)

 

산곡외집시주권제일(山谷外集詩注卷第一)

부(賦)

1. 유명중의 묵죽부【원우 연간에 관사에서 짓다】(劉明仲墨竹賦【元祐間館中作】)

2. 방목정부(放目亭賦)

 

시(詩)

1. 계곡 가에서 읊조리다【서문을 덧붙이다】(溪上吟【幷序】)

2. 청강인【이때 나이 열일곱이었다】(淸江引【時年十七】)

3. 숙부 성모의 「영영천곡」이란 작품에 차운하다(次韻叔父聖謨詠嬰遷谷)

4. 십구 숙부 대원의 작품에 차운하다(次韻十九叔父臺源)

5. 숙부의 조정(叔父釣亭)

6. 암벽 아래에서 맘껏 읊조리다. 5수(巖下放言. 五首)

7. 같은 해 급제한 부군의에게 부치다(寄傅君倚同年)

8. 덕보 동생에게 답하다(答德甫弟)

9. 원발 동생에게 주다【거침없이 말하다】(贈元發弟【放言】)

10. 청명(淸明)

11. 하조성이 호연당을 지었는데, 그 뜻을 펼침이 대단히 훌륭하여 자못 세상을 뛰어넘어 날아가고자 하는 말이 있었다. 건물을 지은 반방사가 육기를 타고 천지 사이에서 노닐기를 바라는 마음에 호연사 2장을 지어 보낸다(何造誠作浩然堂, 陳義甚高然, 頗喜度世飛昇之說. 築屋飯方士, 願乘六氣遊天地間, 故作浩然詞二章, 贈之)

12. 서유자의 사당(徐孺子祠堂)

13. 부모님을 생각하며 여주에서 짓다(思親汝州作)

14. 언화의 작품에 차운하여 장난스레 답하다【원주에서 “언화는 나이 마흔에 벼슬을 버리고 두문불출했다”라고 했다】(次韻戱答彦和【元注云, 彦和年四十, 棄官杜門不出】)

15. 같은 해 급제한 배중모에게 차운하다【이때 중모가 무양위였다】(次韻裴仲謀同年【時仲謀爲舞陽尉】)

16. 유민탄(流民歎)

17. 활주의 외숙의 작품에 차운하여 보내다(次韻寄滑州舅氏)

18. 장중모의 집 앞에서 도미주를 땅에 쏟았기에【중모의 이름은 순이다】(張仲謀家堂前酴醿委地【仲謀名詢】)

19. 등봉의 왕회지가 「등루」라는 작품을 보내왔기에 화답하다(和答登封王晦之登樓見寄)

20. 손불우가 보내온 작품에 화답하다(和答孫不愚見贈)

21. 자다가 일어나(睡起)

22. 집에 돌아와 큰 형에게 드리다(還家呈伯氏)

23. 시진숙의 스물여섯 운에 차운하다(次韻時進叔二十六韻)

24. 황종선에게 부치다(寄黃從善)

 

산곡외집시주권제이(山谷外集詩注卷第二)

1. 설락도가 남양으로부터 도성에 들어가면서 유숙하기에, 모여 술을 마시고 시를 지어 전별했다【섭현은 대개 남양에서 도성으로 들어가는 길에 있다. 또한 황정견이 지은 「송설락도지운향」이란 작품에서 “황산의 섭현에서 담장 마주하고 살았네”라는 구절이 있다. 그러니 이 작품은 섭현에 있을 때 지은 작품이다】(薛樂道自南陽來入都留宿會飮作詩餞行【葉縣蓋南陽入京之路. 又有送薛樂道知鄖鄕詩, 有黃山葉縣連墻居之句, 此詩當是葉縣作】)

2. 강남의 토풍을 장난삼아 읊조리다(戱詠江南土風)

3. 바둑 2수를 지어 임점 공에게 드리다(奕棋二首, 呈任公漸)

4. 효순이 납말을 보내왔기에 사례하다(謝曉純送衲襪)

5. 눈보라를 만나 신채에서 자는데 갑자기 우울해졌다(衝雪宿新寨忽忽不樂)

6. 숭덕군이 거문고 타는 것을 듣다(聽崇德君鼔琴)

7. 곽명보가 영미에 서재를 짓고서 나에게 시작품을 써달라고 했다. 2수(郭明甫作西齊于潁尾, 請予賦詩. 二首)

8. 교대되는 장화보에게 술을 권하다(勸交代張和父酒)

9. 평여를 지나다가 이자선이 그리웠다. 이때 이자선은 병주에 있었다(過平輿, 懷李子先, 時在幷州)

10. 금사화와 도미화를 공수에게 보내다(以金沙酴醿送公壽)

11. 공수가 그리워 부치다(寄懷公壽)

12. 무릉(武陵)

13. 신음재에서 자다 일어나 다섯 수를 지어 세필에게 드리다【왕세필의 이름은 순량이며, 산곡의 매부이니, 이른바 왕랑이다】(呻吟齋睡起五首呈世弼【王世弼名純亮, 山谷妹夫, 所謂王郞者】)

14. 자고가 보내온 십운에 삼가 답하다(奉答子高見贈十韻)

15. 자고를 불러 이십이운의 작품을 짓고 더불어 상보 세필에게 편지로 보내다(招子高二十二韻兼簡常甫世弼)

16. 사자고의 「독연명전」이라는 작품에 차운하다(次韻謝子高讀淵明傳)

17. 왕세필의 「기상칠형선생」이라는 작품의 운자를 사용하여 삼가 화운하다(奉和王世弼寄上七兄先生用其韻)

18. 오언이 번양으로 돌아가기에 전송하다【작품 가운데 있는 ‘삼견추기상’이라는 구절은 대개 북경에 있었던 3년을 말한다】(送吳彦歸番陽【詩中有三見秋氣爽之句, 蓋在北京三年矣】)

19. 2월 정묘일에 희우가 내렸다. 오체로 북문유수 문로공을 위해 짓다【『실록』을 살펴보니, 희녕 7년 황정견은 판하양이 되었고 문언박은 판대명부가 되었었다】(二月丁卯喜雨, 吳體爲北門留守文潞公作【按實錄, 熙寧七年, 判河陽, 文彦博判大名府】)

20. 이우사가 시를 지어 매화를 노공에게 보내왔다. 나는 비록 이우사를 만난 적이 없지만, 그 사람됨을 생각하면서 노두가 원차산에게 화운한 시의 예를 이용하여 차운한다(李右司以詩送梅花至潞公, 予雖不接右司, 想見其人, 用老杜和元次山詩例, 次韻)

21. 외구가 왕정중삼장이 조서를 받들어 남병을 살피고 돌아오는 길에 회양에 이르러 역마를 버리고 배를 타고 지나는 것을 보고 기뻐하며 지은 작품에 차운하다. 3수(次韻外舅喜王正仲三丈奉詔相南兵, 回至襄陽, 捨驛馬就舟見過. 三首)

22. 정중삼장이 형산에서 돌아와 복명하면서, 역마를 버리고 외구 사증을 지나다가 화답하여 준 작품에 차운하다(次韻正仲三丈自衡山返命, 舍驛過外舅師厚贈答)

 

산곡외집시주권제삼(山谷外集詩注卷第三)

1. 자첨의 「춘채」에 차운하다(次韻子瞻春菜)

2. 윤달에 하상에서 동년 이백 이자진을 방문하였는데, 자진이 시로 사례하기에 그 시에 차운하다(閏月訪同年李夷伯子眞於河上子眞以詩謝次韻)

3. 이자진이 하상에서 초대하면서 시를 보냈는데 자못 하상의 풍경을 자랑하기에 장난삼아 답하면서 애오라지 한 번 웃어본다(戱答李子眞河上見招來詩頗誇河上風物聊以當嘲云)

4. 이자진의 「독도유시」에 화답하다(和答李子眞讀陶庾詩)

5. 위소주를 본 떠서 병인일 14수를 짓다【서문을 함께 싣다】(丙寅十四首效韋蘇州【并序】)

6. 공정에게 차를 빻으라고 재촉하다(催公靜碾茶)

7. 앞의 운자를 사용하여 공정에게 장난치다(用前韻戲公靜)

8. 술을 대하고 노래하여 사공정에게 답하다(對酒歌答謝公靜)

9. 결명을 심다(種決明)

10. 세필과 함께 지어 제남에 있는 백씨에게 보내고 더불어 육구 사부에게 올리다(同世弼韻作 寄伯氏在濟南 兼呈六舅祠部)

11. 백씨가 제남에 도착하여 시를 보내왔는데, 자못 태수가 거처하는 곳에 호산의 승경이 있다고 했다. 이에 같은 운으로 화운하다【제남은 제주이다. 이공택이 활주 통판으로 있었고 악주를 다스렸는데, 호주로 옮겨갔다가 다시 제주로 옮겨졌다】(伯氏到濟南 寄詩 頗言太守居有湖山之勝同韻和【濟南卽齊州. 李公擇自滑州通判知鄂, 徙湖, 又移齊】)

12. 이육제의 「제남군성교정」의 시에 차운하여 보내다【이육제는 덕수이다】(次韻 寄李六弟濟南郡城橋亭之詩【德叟】)

13. 『시경』의 「먼동이 트도록 잠을 못자고 부모님 두 분을 생각하노라」를 운으로 삼아 덕수 이병이에게 부치다(用明發不寐有懷二人爲韻寄李秉彛德叟)

14. 사후를 모시고 백화주에서 노닐다가 범문정 사당 아래에서 다리 뻗고 앉아서 양담이 사안을 생각하며 「생존화옥처, 영락귀산구」라를 시를 읊고 통곡한 것이 생각나 열 수를 짓다(陪謝師厚遊百花洲槃礴范文正祠下道羊曇哭謝安石事因讀生存華屋處零落歸山丘爲十詩)

15. 백화주에서의 잡제(百花洲雜題)

16. 대나무 아래에서 술잔을 들고(竹下把酒)

17. 저물녘 누각에 올라 생각하다(砌臺晚思)

18. 사후의 「접화」에 화답하다(和師厚接花)

19. 사후의 「재죽」에 화답하다(和師厚栽竹)

20. 사후가 빗속에 낮잠을 자다가 강남의 누룩으로 빚은 술이 그리워 지은 시에 차운하다(次韻師厚雨中晝寢憶江南餅麴酒)

21. 사후께서 원추리를 읊은 시에 차운하다(次韻師厚萱草)

22. 외숙이 병으로 복관에 사배(謝拜)하지 못하고서 비 내리는 여름날에 잠들다 일어나 지은 시에 차운하다(次韻謝外舅病不能拜復官, 夏雨眠起之什)

23. 사후께서 지은 「병간」에 차운하다. 10수(次韻師厚病間. 十首)


저자

황정견/ 북송(北宋)을 대표하는 시인


역자

박종훈 朴鍾勳, Park Chong-hoon

지곡서당(芝谷書堂)에서 한학(漢學)을 연수했으며, 조선대학교 국어국문학부(고전번역전공)에 재직 중이다.

박민정 朴玟貞, Park Min-jung

고려대학교에서 중국고전시 박사학위를, 중국저장대학(浙江大學)에서 대외한어교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세종사이버대학교 국제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관성 李灌成, Lee Kwan-sung

곡부서당에서 서암 김희진 선생에게 한문을 배웠다. 현재 퇴계학연구원에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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