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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견시집주 7
저자 황정견 역자/편자 박종훈, 박민정, 이관성
발행일 2024-08-15
ISBN 979-11-5905-921-6 (94820)
쪽수 488
판형 152*223 양장
가격 3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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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다운 시가 시대, 그 중심에 있던 황정견

송나라는 개국(開國) 왕조인 태조부터 인종조(仁宗朝)를 거치면서 만당(晩唐)·오대(五代)의 장기간 혼란했던 국면이 정리되어 나라가 안정되었고, 백성들의 생활환경 또한 비교적 안정을 찾게 되었다. 전대(前代)의 가혹했던 정세가 완화됨에 따라 농업이 급속도로 발달하였고, 안정된 농업의 경제적 기초 위에서 상공업이 번창하고, 번화한 도시가 등장하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전대에 비해 상당한 풍요를 구가하게 되었다. 이처럼 사회 전체가 안정되고 발전함에 따라 일반 백성들은 단조로운 것보다 복잡하고 화려한 것을 추구하게 되었다. 시대적·사회적 환경은 곧 문학 출현의 배경이고, 문학은 사회생활이 반영된 예술이라고 할 만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유협(劉勰)이 “문학의 변천은 사회 정황에 따르다[文變染乎世情, 興廢繫乎時序]”고 한 것처럼, 사회의 각종 요인은 문학적 현상을 결정하기 때문에 이러한 요소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문학 풍조의 변혁을 동반한다. 송초 시체(詩體)의 변천은 이러한 사실을 보여주는 객관적인 증거이다. 특히 송대에는 일찍부터 학문이 중시되었다. 이는 주로 군주들의 독서열과 학문 제창으로 하나의 사회적 풍조로 자리 잡게 되어 송대의 중문중학(重文重學)적 분위기가 마련되었다. 

황정견은 바로 이때 전성기를 구가하여 북송(北宋)을 대표하는 시인이다. 중국시가의 최고 전성기라 할 수 있는 당대(唐代)를 뒤이어 등장한 북송의 시인들에게는 당시에서 벗어난 송시만의 특징을 만들어 내야 하는 일종의 숙명이 있었다. 이러한 숙명은 북송 초 서곤체에 의해 시도되었으며 북송 중기에 이르러 비로소 송시다운 시가 시대를 풍미하기에 이르렀다. 황정견이 그 중심에 있었다. 

 

후대까지 영향을 미친 황정견의 시론

황정견은 시를 지을 때 시의 표현을 다지고 시법을 엄격히 지켜 한 마디 한 글자도 가벼이 쓰지 않았다. 황정견은 수많은 대가들을 본받으려고 했지만, 그중에서도 두보(杜甫)를 가장 존중했다. 황정견은 두보 시의 예술적인 성취나 사회시(社會詩) 같은 내용 측면에서의 계승보다는, 엄정한 시율과 교묘(巧妙)한 표현 등 시의 형식적 측면을 본받으려 했다. 황정견 시론의 요점을 정리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시의 조구법(造句法)으로서의 환골법(換骨法)과 탈태법(奪胎法)이다. 이에 대해 황정견은 “시의 의미는 무궁한데 사람의 재주는 한계가 있다. 한계가 있는 재주로 무궁한 의미를 좇으려고 하니, 비록 도잠과 두보라고 하더라도 공교롭기 어렵다. 원시의 의미를 바꾸지 않고 그 시어를 짓는 것을 환골법이라고 하고, 원시의 의미를 본떠서 형용하는 것을 탈태법이라고 한다[詩意無窮, 而人才有限. 以有限之才, 追無窮之意, 雖淵明少陵, 不得工也. 不易其意而造其語, 謂之換骨法. 規摹其意而形容之, 謂之奪胎法]”(『시인옥설(詩人玉屑)』)라고 한 바 있다. 이로 보건대, 황정견이 언급한 환골법은 의경을 유사하게 하면서 어휘만 조금 바꾼 것을 일컫고, 탈태법은 의경을 변형하여 사용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진부한 표현이나 속된 말을 배척하고 특이한 말과 기이한 표현을 추구했다. 구체적으로는 술어를 중심으로 평이한 글자를 기이하게 단련(鍛鍊)시켰고 조자(助字)의 사용에 힘을 특히 기울였으며, 매우 궁벽하고 어려운 글자를 사용했고 기이한 풍격을 형성하기 위해 전대(前代) 시에서 잘 쓰지 않던 비속(非俗)한 표현을 시어로 구사하여 참신한 의경을 만들어내곤 했다. 

셋째, 전고(典故)의 정밀한 사용을 추구했다. 이는 황정견 시론의 “한 글자도 유래가 없는 것은 없다[無一字無來處]”와 연관된다. 강서시파는 독서를 중시했는데, 이것은 구법의 차원에서 전대 시의 장점을 수용하기 위한 것이지만, 이는 전고의 교묘(巧妙)한 활용이라는 결과로 표현되기도 했다. 그러면서 전인의 전고를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자신의 의도에 맞게 변용했다.

이와 같은 황정견의 창작법에 대해 부정적 평가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 평가는 황정견 시의 파급력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황정견을 중심으로 한 강서시파가 당대(當代)는 물론 후대 및 조선의 문인들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황정견의 시를 세밀히 소개하다

황정견은 현존하는 가장 공신력 있는 중화서국(中華書局)본에 따르면 총 1,916수의 시 작품을 남겼다. 북경(北京) 중화서국(中華書局)에서 2007년에 출간한 전 5책의 『황정견시집주』에는 총 1,260제(題) 1,916수(首)의 시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황정견 작품의 구절 및 시어(詩語) 하나하나가 갖는 전례와 창작배경 그리고 구절의 의미 및 전체적인 의미를 상세하게 주석을 통해 소개해, 황정견 작품의 세밀한 이해를 돕고 있다. 이 책에서는 『황정견시집주』에 소개된 모든 주석을 꼼꼼하게 번역하였으며, 주석의 내용을 시의 자구(字句) 해석에 최대한 반영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황정견 시가 워낙 난해하여, 경우에 따라서는 주석이 시 본문과 어떤 연계성이 있는지조차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이러한 경우에도 연결 관계를 최대한 찾아 시 본문 번역에 녹여내고자 노력하였다.

황정견에 대한 연구는 지금까지 꾸준히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아직까지 황정견 시 작품에 대한 전체적인 번역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구체적인 실상의 일면만을 위주로 하거나 혹은 피상적으로 연구가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이에 상세한 주석을 통해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돕는 『황정견시집주』에 대한 완역은, 부족하나마 후학들에게 황정견 시를 이해하기 위한 초석을 다지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해제

황진시집주서

 

황정견시집주

산곡외시집주

산곡외집시주권제사(山谷外集詩注卷第四)

1. 공정의 시에 차운하여 공정을 전송하다(次韻奉送公定)

2. 사공정의 「하삭만성」에 화운하다. 8수(和謝公定河朔漫成. 八首)

3. 사공정과 왕세필이 주고받은 절구에 차운하다(次韻謝公定王世弼贈答二絶句)

4. 공정과 세필이 함께 북도의 동루에 올라 지은 시에 차운하다. 4수(次韶公定世弼登北都東樓四首)

5. 사공정의 「남만을 정벌한 노래」에 화운하다(和謝公定征南謠)

6. 사후가 중추에 분사서도로 복관한 것을 읊은 시에 화운하다(和師厚秋半時復官分司西都)

7. 사후가 시골에 거처하며 마을의 제군에게 보여준 시에 화운하다(和師厚郊居示里中諸君)

8. 남양의 사 외숙에게 보내다(寄南陽謝外舅)

9. 외숙의 「숙흥」에 화운하다. 3수(和外舅夙興. 三首)

10. 사후가 황련교가 무너지고 큰 나무 또한 가을 벼락에 꺾인 것을 읊은 시에 화답하다(和答師厚黃連橋壞 大木亦爲秋雹所損)

11. 세필이 시를 보내와 순천을 구하니 문득 장안의 술로 함께 한 잔 마시고 싶어서 그 운에 차운하여 장난스레 답하다(世弼惠詩求舜泉 輒欲以長安酥共泛一盃次韻戲答)

12. 대합조개를 이명숙과 제공에게 보내주다(送蛤蜊與李明叔諸公)

13. 세필에게 앞 시의 운자를 써서 장난스레 시를 지어 보내다(戲贈世弼用前韻)

14. 세필이 약사들이 대합의 효과에 대해 좋게 논하지 않는 것을 걱정하는 시를 보내자 장난스레 답하다(世弼病方家不善論蛤蜊之功戲答)

15. 사후가 게를 먹고 지은 시에 차운하다(次韻師厚食蟹)

16. 사 외숙이 나귀 창자를 먹고 지은 시에 차운하다(次韻謝外舅食驢腸)

17. 사후가 마 저작랑에게 자주 준 시에 차운하다(次韻師厚答馬著作屢贈詩)

18. 자첨과 서요문이 저천에 눈과 안개가 일기를 바라며 창화한 시에 차운하다(次韻子瞻與舒堯文禱雪霧豬泉唱和)

 

산곡외집시주권제오(山谷外集詩注卷第五)

1. 박박주. 2장【서문을 함께 실다】(薄薄酒. 二章【并引】)

2. 언심에게 장난삼아 주다【원래 주에서 “이후의 자는 언심이다. 이후의 아우가 남양에 살고 있었다”라고 했다】(戲贈彦深【元注云, 李厚字彦深. 厚之弟居南陽】)

3. 죽헌에서 눈을 읊어 외삼촌 사사후에게 올리며 아울러 이언심을 놀리다(竹軒詠雪呈外舅謝師厚并調李彦深)

4. 『시경』의 “군자를 보지 못한지라 근심하는 마음 즐겁지 않네([未見君子憂心靡樂])”라는 여덟 글자로 팔운의 시를 지어 이사재에게 보내다(賦未見君子憂心靡樂八韻寄李師載)

5. 장 비교의 「희설」에 차운하다. 3수(次韻張秘校喜雪. 三首)

6. 인암의 시에 차운하다. 4수(次韻寅菴. 四首)

7. 『주역』의 “마음을 함께 하는 말은 그 향기로움이 난초와 같다([同心之言其臭如蘭])”는 여덟 글자로 운자를 삼아 이자선에게 보내다(以同心之言其臭如蘭爲韻寄李子先)

8. 자첨이 찬(餐)자 운으로 세 사람에게 화답하였는데 네 번이나 시가 오고가면서도 조금도 어렵게 여기지 않고 더욱 힘차고 기이한 것을 보고서 곧바로 이전 운에 차운하여 팽문의 동파에게 보내다. 3수(見子瞻餐字韻詩和答三人四返不困而愈崛奇輒次舊韻寄彭門. 三首)

9. 자첨이 호주자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화답하여 보내다(再和寄子贍聞得湖州)

10. 앞의 시에 차운하여 요민에게 답하다(次韻答堯民)

11. 봄놀이(春遊)

12. 「감춘」에 차운하다. 5수 (次韻感春五首)

13. 성간이 장차 위 땅에 우거하기 위해 제 땅에서 다니며 걸식하니 자못 가련한 행색을 지녔다. 이에 다시 「감춘」에 차운하여 주었다(聖柬將寓于衞 行乞食于齊 有可憐之色 再次韻感春五首贈之)

 

산곡외집시주권제육(山谷外集詩注卷第六)

1. 개 낭중이 곽 낭중을 이끌고 임무를 쉬며 지은 시에 차운하다. 2수(次韵蓋郎中率郭郎中休官. 二首)

2. 곽 우조의 시에 차운하다(次韻郭右曹)

3. 안문으로 부모님을 뵈러 가는 양관을 보내며. 2수(送楊瓘雁門省親 二首)

4. 장 사하의 시에 차운하여 답하다(次韻答張沙河)

5. 제와 노 등 여러 지방을 유람하러 가는 장 사하를 전송하다(送張沙河遊齊魯諸邦)

6. 장 사하의 「초음(招飮)」에 화답하다(和張沙河招飮)

7. 요민과 함께 영원묘를 유람하였는데, 요헌신이 술을 장만하였다. 마(馬)와 릉(陵)자를 써서 시를 지었다(同堯民游靈源廟廖獻臣置酒用馬陵二字賦詩)

8. 「팔음가」를 지어 조요민에게 주다(八音歌贈晁堯民)

9. 다시 「팔음가」를 지어 조요민에게 주다(八音歌贈晁堯民)

10. 사후가 5월 16일 전원을 구경하고 이어서 이언심을 애도한 시에 차운하다【원주에서 “지난해 5월 13일 언심과 함께 서교에서 노닐었다”라고 했다】(次韻師厚五月十六日視田 悼李彥深【元註云, 去年五月十三日, 與之遊西郊】)

11. 조보지와 요정일이 주고 답한 시에 차운하다(次韻晁補之廖正一贈答詩)

12. 앞의 시에 다시 차운하여 요명략에게 올리다(再次韻呈廖明略)

13. 명략에게 급히 답하는데 마침 요민이 오기에 명략을 만나보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므로 작품 말미에 언급하였다(走答明略適堯民來相約奉謁故篇末及之)

14. 명략에게 답하고 아울러 무구에게 보내다(答明畧并寄無咎)

15. 다시 차운하여 명략에게 올리고 아울러 무구에게 보내다(再次韻呈明略并寄無咎)

16. 다시 명략에게 답하다. 2수(再答明略. 二首)

17. 무구와 염자상이 거문고를 가지고 마을로 들어가서 지은 시에 차운하다(次韻无咎閻子常攜琴入村)

18. 붕우를 맺는 시를 지었는데, 포조의 건제체를 본받아 조무구에게 드리다(定交詩二首效鮑明遠體呈晁無)

19. 무구에게 「팔음가」를 주다(贈無咎八音歌)

20. 「이십팔수가」를 지어 무구에게 이별하며 주다(二十八宿歌贈别無咎)


저자

황정견/ 북송(北宋)을 대표하는 시인


역자

박종훈 朴鍾勳, Park Chong-hoon

지곡서당(芝谷書堂)에서 한학(漢學)을 연수했으며, 조선대학교 국어국문학부(고전번역전공)에 재직 중이다.

박민정 朴玟貞, Park Min-jung

고려대학교에서 중국고전시 박사학위를, 중국저장대학(浙江大學)에서 대외한어교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세종사이버대학교 국제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관성 李灌成, Lee Kwan-sung

곡부서당에서 서암 김희진 선생에게 한문을 배웠다. 현재 퇴계학연구원에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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