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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견시집주 14
저자 황정견 역자/편자 박종훈, 박민정, 이관성
발행일 2024-08-15
ISBN 979-11-5905-928-5 (94820)
쪽수 342
판형 152*223 양장
가격 2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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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다운 시가 시대, 그 중심에 있던 황정견

송나라는 개국(開國) 왕조인 태조부터 인종조(仁宗朝)를 거치면서 만당(晩唐)·오대(五代)의 장기간 혼란했던 국면이 정리되어 나라가 안정되었고, 백성들의 생활환경 또한 비교적 안정을 찾게 되었다. 전대(前代)의 가혹했던 정세가 완화됨에 따라 농업이 급속도로 발달하였고, 안정된 농업의 경제적 기초 위에서 상공업이 번창하고, 번화한 도시가 등장하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전대에 비해 상당한 풍요를 구가하게 되었다. 이처럼 사회 전체가 안정되고 발전함에 따라 일반 백성들은 단조로운 것보다 복잡하고 화려한 것을 추구하게 되었다. 시대적·사회적 환경은 곧 문학 출현의 배경이고, 문학은 사회생활이 반영된 예술이라고 할 만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유협(劉勰)이 “문학의 변천은 사회 정황에 따르다[文變染乎世情, 興廢繫乎時序]”고 한 것처럼, 사회의 각종 요인은 문학적 현상을 결정하기 때문에 이러한 요소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문학 풍조의 변혁을 동반한다. 송초 시체(詩體)의 변천은 이러한 사실을 보여주는 객관적인 증거이다. 특히 송대에는 일찍부터 학문이 중시되었다. 이는 주로 군주들의 독서열과 학문 제창으로 하나의 사회적 풍조로 자리 잡게 되어 송대의 중문중학(重文重學)적 분위기가 마련되었다. 

황정견은 바로 이때 전성기를 구가하여 북송(北宋)을 대표하는 시인이다. 중국시가의 최고 전성기라 할 수 있는 당대(唐代)를 뒤이어 등장한 북송의 시인들에게는 당시에서 벗어난 송시만의 특징을 만들어 내야 하는 일종의 숙명이 있었다. 이러한 숙명은 북송 초 서곤체에 의해 시도되었으며 북송 중기에 이르러 비로소 송시다운 시가 시대를 풍미하기에 이르렀다. 황정견이 그 중심에 있었다. 

 

후대까지 영향을 미친 황정견의 시론

황정견은 시를 지을 때 시의 표현을 다지고 시법을 엄격히 지켜 한 마디 한 글자도 가벼이 쓰지 않았다. 황정견은 수많은 대가들을 본받으려고 했지만, 그중에서도 두보(杜甫)를 가장 존중했다. 황정견은 두보 시의 예술적인 성취나 사회시(社會詩) 같은 내용 측면에서의 계승보다는, 엄정한 시율과 교묘(巧妙)한 표현 등 시의 형식적 측면을 본받으려 했다. 황정견 시론의 요점을 정리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시의 조구법(造句法)으로서의 환골법(換骨法)과 탈태법(奪胎法)이다. 이에 대해 황정견은 “시의 의미는 무궁한데 사람의 재주는 한계가 있다. 한계가 있는 재주로 무궁한 의미를 좇으려고 하니, 비록 도잠과 두보라고 하더라도 공교롭기 어렵다. 원시의 의미를 바꾸지 않고 그 시어를 짓는 것을 환골법이라고 하고, 원시의 의미를 본떠서 형용하는 것을 탈태법이라고 한다[詩意無窮, 而人才有限. 以有限之才, 追無窮之意, 雖淵明少陵, 不得工也. 不易其意而造其語, 謂之換骨法. 規摹其意而形容之, 謂之奪胎法]”(『시인옥설(詩人玉屑)』)라고 한 바 있다. 이로 보건대, 황정견이 언급한 환골법은 의경을 유사하게 하면서 어휘만 조금 바꾼 것을 일컫고, 탈태법은 의경을 변형하여 사용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진부한 표현이나 속된 말을 배척하고 특이한 말과 기이한 표현을 추구했다. 구체적으로는 술어를 중심으로 평이한 글자를 기이하게 단련(鍛鍊)시켰고 조자(助字)의 사용에 힘을 특히 기울였으며, 매우 궁벽하고 어려운 글자를 사용했고 기이한 풍격을 형성하기 위해 전대(前代) 시에서 잘 쓰지 않던 비속(非俗)한 표현을 시어로 구사하여 참신한 의경을 만들어내곤 했다. 

셋째, 전고(典故)의 정밀한 사용을 추구했다. 이는 황정견 시론의 “한 글자도 유래가 없는 것은 없다[無一字無來處]”와 연관된다. 강서시파는 독서를 중시했는데, 이것은 구법의 차원에서 전대 시의 장점을 수용하기 위한 것이지만, 이는 전고의 교묘(巧妙)한 활용이라는 결과로 표현되기도 했다. 그러면서 전인의 전고를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자신의 의도에 맞게 변용했다.

이와 같은 황정견의 창작법에 대해 부정적 평가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 평가는 황정견 시의 파급력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황정견을 중심으로 한 강서시파가 당대(當代)는 물론 후대 및 조선의 문인들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황정견의 시를 세밀히 소개하다

황정견은 현존하는 가장 공신력 있는 중화서국(中華書局)본에 따르면 총 1,916수의 시 작품을 남겼다. 북경(北京) 중화서국(中華書局)에서 2007년에 출간한 전 5책의 『황정견시집주』에는 총 1,260제(題) 1,916수(首)의 시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황정견 작품의 구절 및 시어(詩語) 하나하나가 갖는 전례와 창작배경 그리고 구절의 의미 및 전체적인 의미를 상세하게 주석을 통해 소개해, 황정견 작품의 세밀한 이해를 돕고 있다. 이 책에서는 『황정견시집주』에 소개된 모든 주석을 꼼꼼하게 번역하였으며, 주석의 내용을 시의 자구(字句) 해석에 최대한 반영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황정견 시가 워낙 난해하여, 경우에 따라서는 주석이 시 본문과 어떤 연계성이 있는지조차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이러한 경우에도 연결 관계를 최대한 찾아 시 본문 번역에 녹여내고자 노력하였다.

황정견에 대한 연구는 지금까지 꾸준히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아직까지 황정견 시 작품에 대한 전체적인 번역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구체적인 실상의 일면만을 위주로 하거나 혹은 피상적으로 연구가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이에 상세한 주석을 통해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돕는 『황정견시집주』에 대한 완역은, 부족하나마 후학들에게 황정견 시를 이해하기 위한 초석을 다지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해제

황진시집주서

 

황정견시집주

산곡시외집보

산곡시외집보권제삼(山谷詩外集補卷第三)

1. 어부. 2수【희녕 원년 섭현에서 지은 작품이다】(漁父. 二首【熙寧元年葉縣作】)

2. 옛 어부(古漁父)

3. 양도인의 묵헌에 쓰다【숭녕 2년 융주에서 지은 작품이다】(題楊道人黙軒【崇寧二年戎州作】)

54. 기복의 운자를 써서 백 씨의 사당에 쓰다【치평 3년에 지은 작품이다】(用幾復韻, 題伯氏思堂【治平三年作】)

5. 기복에게 주면서 헤어지다(贈別幾復)

6. 조령이 술을 실고 방문했기에【희녕 원년 섭현에서 지은 작품이다】(趙令許載酒見【熙寧元年葉縣作】)

7. 조령에게 화답하다. 앞 작품은 운자와 같다(和答趙令. 同前韻)

8. 조령의 답시에서 기녀를 데리고 찾아오겠다고 약속했기에(趙令答詩約携山妓見訪)

9. 조령이 술을 실고 온 것에 사례하다【희녕 원년 섭현에서 지은 작품이다】(謝趙令載酒【熙寧元年葉縣作】)

10. 매화를 감상한 작품에 차운하다(次韻賞梅)

11. 차운하여 이단숙에게 답하다【원풍 3년 태화에서 지은 작품이다】(次韻答李端叔【元豊三年太和作】)

12. 봄이 다가오기에. 칠언절구 4수【희녕 2년 섭현에서 지은 작품이다】(春近. 四絶句【熙寧二年葉縣作】)

13. 장난삼아 보진각에 쓰다【희녕 원년 섭현에서 지은 작품이다】(戲題葆眞閣【熙寧元年葉縣作】)

14. 혜남선사에게 장난삼아 주다【혜남은 곧 강서의 늙은 중으로, 적취암 청은이라 부르는데, 또한 분녕에 있었다】(戲贈惠南禪師【惠南卽江西老禪, 號積翠庵淸隱, 亦在分寧】)

15. 갓 생산된 차를 남선사에게 주다【희녕 원년 섭현에서 지은 작품이다】(寄新茶與南禪師【熙寧元年葉縣作】)

16. 『진사』를 읽다【희녕 원년 섭현에서 지은 작품이다】 (讀晉史【熙寧元年葉縣作】)

17. 책을 읽고 기복에게 올리다. 2수【치평 3년에 지은 작품이다】(讀書呈幾復. 二首【治平三年作】)

18. 물길 때문에 막혀, 장난삼아 기복에게 올리다. 2수(阻水戲呈幾復. 二首)

19. 열도에게 주며 헤어지다【희녕 3년 섭현에서 지은 작품이다】(寄別說道【熙寧三年葉縣作】)

20. 허 씨의 설문해자를 익히고 여러 아우들에게 주다【치평 3년 북경에서 지은 작품이다】(學許氏說文贈諸弟【治平三年北京作】)

21. 이대부를 불러 술을 마시다【원우 3년 비서성에서 지은 작품이다】(李大夫招飲【元祐三年秘書省作】)

22. 남강 자리에서 유, 이 두 군에게 주다【원풍 3년 관직이 바뀐 태화에서 지은 작품이다】(南康席上贈劉李二君【元豐三年改官太和作】)

23. 어부에게 묻다【희녕 원년 섭현에서 지은 작품이다】(問漁父【熙寧元年葉縣作】)

24. 광산 가는 길에【치평 4년 섭현에 이르러 지은 작품이다】(光山道中【治平四年赴葉縣作】)

25. 방성을 지나다가 7대 숙조가 옛날에 쓴 작품을 찾다【원풍 원년 북경에서 지은 작품이다】(過方城, 尋七叔祖舊題【元年北京作】)

26. 일찍 길을 나서며【희녕 원년 섭현에 이르러 지은 작품이다】(早行【熙寧元年赴葉縣作】)

27. 신식에서 회수를 건너다(新息渡淮)

28. 비로소 회산이 바라다보이다(初望淮山)

29. 광혜사에서 자다【원풍 7년에 덕평에 이르러 지은 작품이다】(宿廣惠寺【元豐七年赴德平作】)

30. 비로소 섭현에 이르다【희녕 원년에 지은 작품이다】(初至葉縣【熙寧元年作】)

31. 관화 15수【서문을 덧붙이다. 희녕 원년 태평주에서 파직된 후에, 형주로 부터 돌아와 집에 거처하면서 쓴 작품이다】(觀化 十五首【幷序. 熙寧元年罷太平州後, 自荊州居家作】)

32. 왕세필에게 화답하다【희녕 8년 북경에서 지은 작품이다】(和答王世弼【熙寧八年北京作】)

33. 주도인이 세상을 떠나다【원풍 6년 태화에서 지은 작품이다】(朱道人下世【元豐六年太和作】)

34. 진 씨의 정원에서 대나무를 읊조리다【희녕 4년 섭현에서 지은 작품이다】(陳氏園詠竹【熙寧四年葉縣作】)

35. 배중모가 빗속에 석당에서 돌아오기에 화답하다【희녕 2년 섭현에서 지은 작품이다】(和裴仲謀雨中自石塘歸【熙寧二年葉縣作】)

36. 배위가 마안산을 지나면서 지은 작품에 차운하다(次韻裴尉過馬鞍山)

37. 소재옹이 초서로 쓴 벽 뒤에 쓰다【서문을 덧붙이다】(題蘇才翁草書壁後【幷序】)

38. 아내의 죽음을 애도하다【희녕 3년 섭현에서 지은 작품이다】(哀逝【熙寧三年葉縣作】)

39. 순보 부부를 맞이하다【공의 누이는 진소에게 시집갔는데, 순보가 진소의 자이다】(迎醇甫夫婦【公之妹適陳塑, 醇甫其字也】)

40. 하수의 배 위에서 저물녘 술을 마시며 진열도에게 올리다(河舟晩飲呈陳說道)

41. 임군이 관사에서 가을비를 읊은 작품에 차운하다(次韻任君官舍秋雨)

42. 번후묘에 쓰다. 2수(題樊侯廟. 二首)

43. 남사에서 왕염이 이름을 쓴 곳에 쓰다【희녕 3년 섭현에서 지은 작품이다】(題南寺王髯題名處【熙寧三年葉縣作】)

44. 임중미가 헤어지며 보내온 작품에 화답하다【원풍 5년 태화에서 지은 작품이다】(和答任仲微贈別【元豐五年太和作】)

45. 중모가 밤에 느낌이 있어 지은 작품에 화창하다【희녕 2년 섭현에서 지은 작품이다】(和仲謀夜中有感【熙寧二年葉縣作】)

46. 자다가 일어나다. 2수【희녕 3년 섭현에서 지은 작품이다. 당시 포성(蒲城)에 도적이 들끓어 군(郡)이 군교(軍校)의 독촉을 받고 있었다】(睡起. 二首【熙寧三年葉縣作. 時蒲城佚盜, 郡以校見督】)

47. 수양의 일 뒤에 쓰다【희녕 4년 섭현에서 지은 작품이다】(書睢陽事後【熙寧四年葉縣作】)

48. 맘껏 써서 중모에게 올리다【희녕 2년 섭현에서 지은 작품이다】(漫書呈仲謀【熙寧二年葉縣作】)

49. 남선사에 오르자 배중모가 생각나서(登南禪寺, 懷裴仲謀)

50. 임중미에게 차운하여 답하다【원풍 5년 태화에서 지은 작품이다】(次韻答任仲微【元豐五年太和作】)

51. 여름날 백형의 꿈을 꾸고 나서 강남으로 부치다【희녕 4년 섭현에서 지은 작품이다】(夏日, 夢伯兄, 寄江南【熙寧四年葉縣作】)

52. 동손을 만나지 못하고 곤양을 지나다【곤양은 섭협에 속해 있는데, 광무제가 왕망을 격파했던 곳이다】(同孫不愚, 過昆陽【昆陽正屬葉縣, 卽光武破王莽之地】)

53. 돈이 주부에게 부치다. 이때에 고을의 경계에서 수부부가 석당하를 파고 있었다(寄頓二主簿. 時在縣界, 首部夫鑿石塘河)

54. 포원례의 「병기」라는 작품에 차운하여 답하다(次韻答蒲元禮病起)

55. 봄 제사를 섭공묘와 쌍부관에서 나누어 지내다【섭공묘와 쌍부관은 모두 섭현에 있다】 (春祀分得葉公廟雙鳬觀【廟觀皆在葉縣】)

56. 술 마신 손님을 해정하자고 장난삼아 부르다【희녕 4년 섭현에서 지은 작품이다】(戲招飲客解酲【熙寧四年葉縣作】)

57. 진 씨 여제를 전송하며 석당하에 이르다(送陳氏女弟, 至石塘河)

58. 장난삼아 돈이 주부에게 주다【돈이 주부가 술을 마련하지 않았었다】(戱贈頓二主簿【不置酒】)

59. 손불우가 개원고사에 의거해 봄 난간으로 옮기길 청하자, 이로 인해 답을 보내다(孫不愚引開元故事, 請爲移春檻, 因而贈答)

60. 진열도가 곤궁하기에 채소 한 움큼을 보내다【희녕 3년 섭현에서 지은 작품이다】(陳說道約日送菜把【熙寧三年葉縣作】)

61. 공상보가 보내온 시에 답하며 화창하다(答和孔常父見寄)

62. 백 씨의 시에 차운하여 안석당의 연화주를 보내온 것에 사례하다(次韻伯氏, 謝安石塘蓮花酒)

63. 쌍부관에 쓰다(題雙鳬觀)

64. 진계장에게 대나무통을 구해 물을 부엌으로 끌어들이다(從陳季張, 求竹竿, 引水入廚)

65. 왕명복과 진계장에게 올리다(呈王明復陳季張)

66. 새벽에 임대부 조행을 따라 석교를 지나다가 수보에게 부치다【희녕 3년 섭현에서 지은 작품이다】(曉從任大夫祖行, 過石橋, 寄粹甫【熙寧三年葉縣作】)

67. 남선의 매화 아래에서 술을 마시다가 장난삼아 쓰다【희녕 3년 섭현에서 지은 작품이다】(飲南禪梅下, 戲題【熙寧三年葉縣作】)

68. 소지재의 「장유민과현백령균전」이라는 작품에 차운하다【희녕 4년 섭현에서 지은 작품이다】(次韻邵之才將流民過懸帛嶺均田【熙寧四年葉縣作】)

69. 진계장에게 촉부용이 있었는데, 술을 잘 마시는 손님이 찾아와 꽃이 피자마자 곧바로 꺾어 갔다. 이에 시를 지어 희롱하다(陳季張有蜀芙蓉, 長飲客至, 開輒翦去, 作詩戲之)

70. 거듭 진계장에게 거상화를 보내다. 2수(再贈陳季張拒霜花. 二首)

71. 두자경이 서회로 돌아가기에 전송하다(送杜子卿歸西淮)

72. 눈 속에 연일 길을 가다가 장난삼아 써서 동료에게 편지처럼 보내다(雪中連日行役, 戲書簡同僚)

73. 이녀에서 장자에게 부치다【희녕 4년 섭현에서 지은 작품이다】(離汝寄張子【熙寧四年葉縣作】)

74. 원례의 「춘회」 10수에 차운하다(次韻元禮春懷. 十首)

75. 거듭 원례의 「춘회」 10수에 화답하다【서문을 덧붙인다】(再和元禮春懷 十首【幷序】)

76. 차운하여 중모의 「야화당사」라는 작품에 삼가 화답하다【희녕 4년 섭현에서 지은 작품이다】(次韻奉和仲謨夜話唐史【熙寧四年葉縣作】)

77. 무양의 서사에서 예전 글을 썼던 곳에 쓰다【서문을 덧붙이다. 희녕 2년 섭현에서 지은 작품이다】(書舞陽西寺舊題處【幷序. 熙寧二年葉縣作】)

78. 이 씨의 정원에서 술을 마시다. 3수【원풍 원년 북경에서 지은 작품이다】(飲李氏園. 三首【元豐元年北京作】)

79. 황산에서 자다【희녕 4년 섭현에서 지은 작품이다】(宿黃山【熙寧四年葉縣作】)

80. 계장의 죽림촌에 쓰다(題季張竹林村)

81. 소지재에게 차운하여 답하다(次韻答邵之才)

82. 이경에게 드리다(呈李卿)

83. 6월 비를 애타게 바라다【희녕 7년 북경에서 지은 작품이다】(六月閔雨【熙寧七年北京作】)

84. 이미 비를 애타게 기다라는 시를 지었다. 그날 밤에 마침내 비가 내려, 기쁨 속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일어나 비가 내림을 기뻐하는 시를 지었다(旣作閔雨詩. 是夕遂澍雨, 夜中喜不能寐, 起作喜雨詩)

85. 공익과 차를 맛보다【원풍 원년 북경에서 지은 작품이다】(公益嘗茶【元豐元年北京作】)

86. 내가 이미 섭현의 벼슬에서 옮겨져 마침내 낙수의 물가를 지나다가 며칠 동안 술에 취해 노닐었다【희녕 4년 섭현에서 지은 작품이다】(予旣不得葉, 遂過洛濱, 醉遊累日【熙寧四年葉縣作】)

87. 잡시【원풍 2년 북경에서 지은 작품이다】(雜詩【元豐二年北京作】)

88. 조촌 가는 길에【원풍 2년 북경에서 지은 작품이다】(曹村道中【元豐二年北京作】)

89. 멋대로 써서 기복에게 드리다. 3수【치평 3년에 지은 작품이다】(漫書呈幾復. 三首【治平三年作】)

90. 기복을 머물게 하며 술을 마시다【치평 3년에 지은 작품이다】(留幾復飲【治平三年作】)

91. 거듭 기복을 머물게 하다(再留幾復)

92. 진정자가 여지를 보내주었기에 사례하다. 3수【원풍 4년 태화에서 지은 작품이다】(謝陳正字送荔枝. 三首【元豐四年太和作】)

 

산곡시외집보권제사(山谷詩外集補卷第四)

1. 용문의 반수재가 보내온 작품에 답하다【희녕 4년 섭현에서 지은 작품이다】(答龍門潘秀才見寄【熙寧四年葉縣作】)

2. 장중모에게 차운하여 부치다(寄張仲謀次韻)

3. 나그네가 담부에서 왔는데 명인사의 중이라고 했으며, 정소당을 짓고서는 내게 작품을 요구했다(客自潭府來, 稱明因寺僧, 作靜照堂, 求予作)

4. 잡시. 7수【희녕 4년 섭현에서 지은 작품이다】(雜詩. 七首【熙寧四年葉縣作】)

5. 한삼가에서 술을 마시고 취한 이후에야 비로소 밤비가 내린 줄 알았다(飲韓三家, 醉後始知夜雨)

6. 장중모가 강에서 잡은 잉어를 보냈는데 아직 오지 않았기에 장난삼아 시를 지어 재촉하다(張仲謨許送河鯉未至, 戲督以詩)

7. 장중모의 「범주」라는 시에 화답하다(和答張仲謨泛舟之詩)

8. 오이를 먹다 생각이 일어(食瓜有感)

9. 길을 가다 공수에게 부치다【희녕 5년 섭현에서 북경에 이르러 지은 작품이다】(道中寄公壽【熙寧五年自葉赴北京作】)

10. 길을 가다가. 잡편 6수(行邁. 雜篇 六首)

11. 거현재【희녕 4년 섭현에서 지은 작품이다】(去賢齋【熙寧四年葉縣作】)

12. 수노가에서 주렴 너머로 비파 소리를 듣다【원풍 2년 북경에서 지은 작품이다】(粹老家隔簾聽琵琶【元豐二年北京作】)

13. 강남【원풍 2년 북경에서 지은 작품이다】(江南【元豐二年北京作】)

14. 길을 가다 경진에게 부치며 더불어 유원진에게 편지 삼아 보내다【희녕 5년 북경에서 지은 작품이다】(道中, 寄景珍, 兼簡庾元鎭【熙寧五年北京作】)

15. 경진의 「도미」라는 작품에 차운하다(次韻景珍酴醿)

16. 마수노와 범덕유에게 드리다【원풍 2년 북경에서 지은 작품이다】(呈馬粹老范德孺【元豐二年北京作】)

17. 장중모가 단오에 멋진 작품을 보내왔기에 사례하다【희녕 4년 섭현에서 지은 작품이다】(謝張仲謀端午送巧作【熙寧四年葉縣作】)

18. 장자렬에게 차를 보내다(送張子列茶)

19. 3월 임신에 효민 희효와 정명사의 경장에서 『홍명집』에 실려 있는 심형의 「동유견오제인유명경사」라는 시작품을 보았다. 이에 차운하여 두 공에게 올리다【원풍 2년 북경에서 지은 작품이다】(三月壬申, 同堯民希孝, 觀淨名寺經藏得弘明集中沈炯同庾肩吾諸人游明慶寺詩, 次韻奉呈二公【元豐二年北京作】)

20. 비가 지나고 성 서편의 소가에 이르다【원우 원년 비서성에서 지은 작품이다】(雨過至城西蘇家【元祐元年秘書省作】)

21. 중모가 새로 지은 시를 보여주었기에 사례하다【희녕 4년 섭현에서 지은 작품이다】(謝仲謀示新詩【熙寧四年葉縣作】)

22. 10월 15일 청도관 소요당에서 아침을 먹다(十月十五日, 早飯淸都觀逍遙堂)

23. 홍초동에서 홀로 자며【희녕 3년 섭현에서 지은 작품이다】(紅蕉洞獨宿【熙寧三年葉縣作】)

24. 봄날 눈 내리자 장중모에게 드리다【희녕 4년 섭현에서 지은 작품이다】(春雪, 呈張仲謀【熙寧四年葉縣作】)

25. 유태박이 가족들을 데리고 여산을 유람하며 보내온 작품에 화답하다【원풍 3년 태화에 부임하면서 길 가다 지은 작품이다】(和答劉太博携家遊廬山見寄【元豐三年赴太和道中作】)

26. 백 씨가 한정옹에게 장난삼아 지어준 작품에 차운하다. 국화가 필 때에 한정옹의 집에 좋은 술이 있었다【희녕 4년 섭현에서 지은 작품이다】(次韻伯氏戲贈韓正翁. 菊花開時, 家有美酒【熙寧四年葉縣作】)

27. 이강문에게 답하다【원풍 2년 북경에서 지은 작품이다】(答李康文【元豐二年北京作】)

28. 팽남양을 전송하며(送彭南陽)

29. 등신사가 부모님을 뵙기 위해 장사로 돌아가기에 전송하며【희녕 4년 섭현에서 지은 작품이다】(送鄧愼思歸長沙覲省【熙寧四年葉縣作】)

30. 시중에게 포단을 구하다【원풍 5년 태화에서 지은 작품이다】(從時中乞蒲團【元豐五年太和作】)

31. 제군들이 내가 작년에 지은 「취벽도」라는 작품에 뒤미처 화답한 작품에 장난삼아 답하다(戲答諸君追和予去年醉碧桃)

32. 눈 온 뒤에 남산 모정에 올라 장중모에게 편지로 보내다. 2수【희녕 4년 섭현에서 지은 작품이다】(雪後登南禪茅亭, 簡張仲謀. 二首【熙寧四年葉縣作】)

33. 경진 태박이 예전에 창화했던 「포도」라는 작품을 보여주기에, 이로 인해 차운한다【희녕 5년 북경에서 지은 작품이다. 경진의 이름은 영빈이다】(景珍太博見示舊唱和蒲萄詩, 因而次韻【熙寧五年北京作. 景珍名令蠙】)

34. 염사와 염팔이 경사에 도착했기에 기뻐하며【원풍 8년 도하에서 관직이 바뀌었을 때 지은 작품이다】(喜念四念八至京【元豐八年都下改官作】)

35. 백 씨가 보내온 「개낭중이 노두 시 배우는 것을 좋아했다」라는 작품에 차운하다【원풍 2년 북경에서 지은 작품이다】(韻伯氏寄贈蓋郞中喜學老杜之詩【元豐二年北京作】)

36. 개낭중이 은혜롭게 보내온 작품 중에 “이강이 일노를 공격하니, 싸우지 않아도 이기네”라는 조롱의 표현이 있었다. 차운하여 이를 해명한다(蓋郞中惠詩, 有二强攻一老, 不戰而勝之嘲. 次韻解之)

37. 여비승에게 화창하다【원풍 2년 북경에서 지은 작품이다】(和呂秘丞【元豐二年北京作】)

38. 잡시. 4수【원풍 2년 북경에서 지은 작품이다】(雜詩. 四首【元豐二年北京作】)

39. 자고의 「즉사」라는 작품에 차운하다【희녕 8년 북경에서 지은 작품이다】(次韻子高卽事【熙寧八年北京作】)

40. 차운하여 광릉에 있는 남육에게 부치다【숭녕 2년 악주로부터 의주에 이르러 지은 작품이다】(次韻寄藍六在廣陵【崇寧二年自鄂赴宜州作作】)

41. 다시 화답하여 남육에게 보내다(再和寄藍六)

42. 백락천을 모방하여 장난삼아 쓰다【희녕 4년 섭현에서 지은 작품이다】(戲書效樂天【熙寧四年葉縣作】)

43. 여성시【서문을 덧붙이다】【희녕 4년 섭현에서 지은 작품이다】(余成詩【幷序】【熙寧四年葉縣作】)

44. 장중모에게 부치다【희녕 4년 섭현에서 지은 작품이다】(寄張仲謀【熙寧四年葉縣作】)

45. 「봄날 노닐다가 열도에 헤어지며」라는 작품에 차운하다. 2수【희녕 3년 섭현에서 지은 작품이다】(次韻春遊別說道. 二首【熙寧三年葉縣作】)

46. 강무대 남쪽에서 감흥이 일어【원풍 2년 북경에서 지은 작품이다】(講武臺南有感【元豐二年北京作】)

47. 손불우가 마실 것을 요구하는데, 중양절의 술을 이미 다 마셨기에 장난삼아 답하며 한 편을 짓다【희녕 4년 섭현에서 지은 작품이다】(孫不愚索飲, 九日酒已盡, 戲答一篇【熙寧四年葉縣作】)

48. 외람되게도 수도 형제가 편지를 보내왔는데, 오랫동안 답장을 하지 못했다. 장구를 지어 불민함을 사죄했다(辱粹道兄弟寄書, 久不作報, 以長句謝不敏)

49. 지명의 「조도부 숙질을 초대하며」라는 작품에 화답하다【원풍 5년 태화에서 지은 작품이다】(和知命招晁道夫叔姪【元豐五年太和作】)

50. 거듭 차운하여 장난삼아 도부에게 주다(再次韻, 戲贈道夫)

51. 가을날의 상념(秋思)

52. 희중이 이도위의 북원에서 열린 술자리에 초대했다【원풍 2년 북경에서 지은 작품이다】(希仲招飲李都尉北園【元豐二年北京作】)

53. 서산을 지나다(過西山)

54. 밤에 옆 배의 최가의 아이가 부르는 노래를 듣고(夜聞鄰舟崔家兒歌)

55. 거듭 답하다(重答)

56. 홍구에서(鴻溝)

57. 배진공의 서당에서(裴晉公書堂)

58. 자산묘에서(子產廟)

59. 이십제 창이 ‘화’자에 화답한 것을 보고 생각나는 대로 읊조리다. 5수(見二十弟倡和花字, 漫興. 五首)

60. 9월 9일 국화를 대하니, 하수 가에 있는 수노가 그리워 짓다. 4수【뒤 2수는 비파를 타던 여종을 위해 지은 것이다】(九日對菊, 有懷粹老在河上. 四首【後二首爲琵琶女奴作】)

61. 사창과 왕박유에게 보내다【원풍 2년 북경에서 지은 작품이다】(贈謝敞王博喻【元豐二年北京作】)

62. 곽감부의 「영설」에 화답하다【원풍 2년 북경에서 지은 작품이다】(和答郭監簿詠雪【元豐二年北京作】)

63. 숙직하며 진자혜에게 부치다(直舍, 寄陳子惠)

64. 정회의 「우후」라는 작품에 화운하다【희녕 8년 북경에서 지은 작품이다】(和庭誨雨後【熙寧八年北京作】)

65. 정회의 「고우불출」이라는 작품에 화운하다(和庭誨苦雨不出)


저자

황정견/ 북송(北宋)을 대표하는 시인


역자

박종훈 朴鍾勳, Park Chong-hoon

지곡서당(芝谷書堂)에서 한학(漢學)을 연수했으며, 조선대학교 국어국문학부(고전번역전공)에 재직 중이다.

박민정 朴玟貞, Park Min-jung

고려대학교에서 중국고전시 박사학위를, 중국저장대학(浙江大學)에서 대외한어교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세종사이버대학교 국제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관성 李灌成, Lee Kwan-sung

곡부서당에서 서암 김희진 선생에게 한문을 배웠다. 현재 퇴계학연구원에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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