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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 자서전
복각본
저자 최승희 역자/편자 소명출판 편집부 편
발행일 2023.07.31
ISBN 979-11-5905-815-8
쪽수 196(화보포함)
판형 125*185, 소프트양장
가격 2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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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선의 리듬, 더 크게 말하면 동양의 리듬을 갖고 괴나리봇짐 짊어지고 지구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걸어 보렵니다.”


1920년대 조선, 기생이 아닌 여성의 춤은 상상도 할 수 없던 시기,

식민지 조선의 틀을 깨고 나온 무용가 최승희


조선에서 일본으로, 유럽, 북미, 남미까지 뻗어 나간 최승희의 행보와 성공.

20세기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무용가, 일명 ‘세계의 무희’ 최승희의 자서전이 1937년 최초 출간된 형태와 활자 그대로 복원되어 출간된다.

월북 예술가인 최승희는 사회 분위기 속 오랫동안 금기시되며 그간의 많은 자료들도 함께 불태워 없어졌다. 1937년 발간된 『최승희 자서전』은 20대 후반의 젊은 최승희가 기록되었고, 친일 협력의 도구가 되기 전, 불운의 시간이 당도하기 전, 전통 춤과 민족 유산, 새로운 무용 예술에 심취해 있었던 무용가 최승희를 만날 수 있다.

목차 (目次)

사진 (寫眞)


경성무용연구소시대 (京城舞踊硏究所時代)_(7)

순천역에서 (順天驛에서)_8

무여무 (巫女舞)_9

희망을 안고 (希望을 안고)_10

석정문하시대 (石井門下時代)_11

소야곡(초야대) (小夜曲)(初夜臺)_12

희생 (犧牲)_13

검무 (劍舞)_14

오제의 죽엄_15

승무 (僧舞)_16

오리엔탈_17

메리-위도우_18

광상곡 (狂想曲)_19

조선풍듀엣트 (朝鮮風듀엣트)_20

가두예 (街頭藝)_21

마음에흐름_22

○터에서 (○攄에서)_23

에헤야노아라_24

무여무 (巫女舞)_25

동형의 씨스템 (動形의 씨스템)_26

동형의 씨스템 (動形의 씨스템)_27

도약 (跳躍)_28

섬라(태국)의 춤 (暹邏의 춤)_29

인도인의 비애 (印度人의 悲哀)_30

민요조 (民謠調)_31

진양조 (盡陽調)_32

도약 (跳躍)_33

제일회향토방문시(무여무) (第一回鄕土訪問時)(巫女舞)_34

농부춤•스페인(서반야)춤 (農夫춤•西班牙춤)_25

도약•폭풍우 (跳躍•暴風雨)_36


학교를 맟을 때 까지 _1

나와 서모 (庶母)_5

나의결심과 나의성격_10

논물의리별_16

고향을 떠나 새로운 연구에_20

독립 무용 연구소 건설_22

결혼전후_25

또다시 동경에_27

출발전야 (出發前夜)_30

누이에게 주는 편지_최승일(崔承一)_48

형제에게 보내는 글 (兄弟)_최승희(崔承喜)_61

고뇌의 표현 (苦惱의 表現)_최승희(崔承喜)_66

무용은 마음의 창 (舞踊은 마음의 窓)_무용가 석정막 (舞踊家 石井漠)_72

무희 최승희 론 (舞姬 崔承喜 論)_소설가 천단강성(小說家 川端康成)_75

최승희에게 기함 (崔承喜에게寄함)_개조사 사장 산본실언(改造社 社長 山本實彦)_84

민족무용가로서의 최승희 (民族舞踊家로서의 崔承喜)_평론가 원지공방 (評論家 園池公坊)_88

최승희에게 주문함 (崔承喜에게 註文함)_평론가 중촌추일(評論家 中村秋一)_90

한개의 감상 (한개의 感想)_철학가 류종열(哲學家 柳宗悅)_93

최승희여사의무용을보고 (崔承喜女士의舞踊을보고)_평론가 신거격(評論家 新居格)_95

최승희찬 (崔承喜讚) 소설가 촌산지의(小說家 村山知義)_99

미견최승희(조선파와 서무파) (未見崔承喜)(朝鮮派와 西舞派)_소설가 강전삼랑(小說家 岡田三郞)_103

최승희론 (崔承喜論)_평론가 삼산평조(評論家 杉山平助)_107

최승희의무용예술 (崔承喜의舞踊藝術)_소설가 판원직자 (小說家 板垣直子)_110

최승희의무용세계에○하아 (崔承喜의무용세계에○하아)_평론가 청야계길(評論家 靑野季吉)_114

동양의리듬 (東洋의리듬)_이화여자전문학교교수 박경호(梨花女子專門學校교수 朴강浩)_118

육체의탄력(肉體의彈力)_조선중앙일보학예부장 김복희(朝鮮中央日報學藝部長 金復熙)_121

장쾌한진로를축복한다 (壯快한進路를祝福한다)_평론가 박영희(評論家 朴英熙)_122

세련되어가는기예 (洗鍊되어가는技藝)_동아일보학예부장 서항석 (東亞日譜學禮部長 徐恒錫)_126

조선사람의자랑이되도록 (朝鮮사람의자랑이되도록)_신동아 주간 최승만 (新東亞 主幹 崔承萬)_127

최승희의인○(최승희의印○)_조광 주간 함대훈(朝光 主幹 咸大勳)_128

과거의추억과미래의기대 (過去의追憶과未來의期待)_화가 안석주 (畵家 安碩柱)_133

최승희무용 (崔承喜舞踊)_최승일(崔承一)_137

최승희작품해설 (崔承喜作品解說)_음악평론가 산우충 (音樂評論家 山牛充)_141

추천의 글

무용가 최승희는 존재 자체가 ‘파격(破格)’이었다. 1920년대의 조선은 기생이 아닌 여성의 춤을 상상할 수 없었던 때였다. 그러나 최승희는 식민지 조선의 사회문화적 기호를 과감히 깨부수거나 없었던 것을 서슴없이 해보이는 방식으로 조선의 리듬과 춤의 표징이 되었다. 그녀의 단발, 놀랍도록 다채로운 표정, 변신과 같은 화장, 조각 같은 인간 몸의 선, 그전까지 알지 못했던 육체의 탄력미 등은 조선의 전통 무용과 모던 댄스, 향토풍의 신무용과 동양적인 것, 나아가 인터내셔널 예술을 지향했다. 이것들은 어느 하나 당연하거나 자연스럽지 않았다. 최승희의 춤과 생의 희열은 이런 불협화음과 암중모색 사이에서 새어 나오는 찰나의 빛과 같다. 

조선에서 일본으로, 유럽을 거쳐 남미까지 뻗어 나간 최승희의 행보와 성공, 활약과 명성 뒤에는 피식민자의 우울과 여성의 고뇌, 도약의 무용시(舞踊詩)를 창작하려는 예술가의 지독한 번민이 운명처럼 자리하고 있다. 1937년에 발간된 『최승희 자서전』에는 인생 여정에서 아직 산마루에 도착하지 않은 20대 후반의 젊은 최승희가 기록되어 있고, 그녀에 대한 동시대인들의 기억이 누적되어 있다. 최승희가 적극적인 친일 협력의 도구가 되기 직전, 불운의 시간이 당도하기 전, 전 통춤과 민족 유산, 새로운 무용 예술에 심취해 있었던 무용가 최승희를 만날 수 있다.

문경연 동국대학교 다르마칼리지 초빙교수

해방 이후 북한에서 조선무용가동맹 위원장, 무용학교 교장, 최승희무용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한 무용가.

1911년 강원도 홍천에서 출생했다. 최준현(崔濬鉉)의 딸이며, 어머니는 박용자(朴容子)이다. 영화제작자 최승일(崔承一)의 동생이다. 1926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최승일의 권유로 경성공회당(京城公會堂)에서 일본 현대 무용의 선구자 이시이 바쿠〔石井漠〕의 공연을 보고 무용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도일했다. 1926년 5월 본격적인 무용 수업을 위해 도쿄로 건너간 뒤 약 3년 만에 주역급 무용수로 발탁되었고, 수석대교(首席代敎)로 후진을 지도할 만큼 급성장했다. 1927년과 1928년 이시이바쿠의 조선공연에 참가하여 호평을 받았다. 1929년 귀국하여 경성에 무용연구소를 설립했으며, 이해 12월 찬영회가 주최하는 ‘무용·극·영화 밤’에 출연했다. 1930년부터 본격적인 무용 공연을 시작했다. 이해 2월 개성에서 무용 대회, 3월 창작 무용 공연회, 10월 제2회 공연회, 11월 대전에서 무용 대회를 각각 가졌다. 1931년 문학가 안막(安漠)과 결혼했다. 이외에 「파우스트」·「광상곡」·「그들의 로맨스」·「그들의 행진곡」·「흙을 그리워하는 무리」 등 가극과 창작극을 발표, 공연했다. 이 시기 전국을 순회하면서 신문사 애독자 공연, 동정금 모금 공연 등 다채로운 공연을 했다.


1933년 3월 이시이 문하로 재입문하여 약 1년 만에 청년회관에서 전통과 현대 무용을 접목한 창작극 「에헤야 노아라」를 발표하여 좋은 평가를 받았다. 1936년 영화 「반도(半島)의 무희」에 출연했으며, 이해 말부터 4년간 세계 무대로 진출하여 유럽에서는 「초립동」·「화랑무」·「신로심불로」·「장구춤」·「춘향애사」·「즉흥무」·「옥저의 곡」·「보현보살」·「천하대장군」 등 공연했다. 1938년 브뤼셀에서 개최된 제2회 세계무용경연대회에서는 심사위원을 맡았다. 1930년 미국 뉴욕에서는 당시 흥행계의 제왕으로 불리던 휴록(Hurok.S.)의 기획 아래 NBC전국체인과 제휴하면서 미국은 물론, 중남미 여러 나라에서 공연했다. 특히, 뉴욕 공연 후 ‘세계 10대 무용가의 한 사람’이라는 평을 받았다.


중일전쟁 이후 전시 체제기가 형성되면서 일제에 협력했다. 1941년 10월 일본 오사카(大阪)회관에서 협화회원을 위로하는 공연을 했으며, 11월에는 도쿄극장에서 조선군 보도부가 내선일체와 지원병을 선전하는 영화 「그대와 나」 시사회에서 「화랑의 춤」 등을 공연했다. 이해 11월 도쿄에서 공연한 수익금을 일본 육군성 휼병부(恤兵部)에 헌금했다. 1942년에는 조선군사보급협회에서 주최하는 무용공연에서 수익금 전액을 조선군사보급협회에 기부했다. 1944년에는 도쿄에서 24회 연속 독무 공연을 했다. 이외에 일본의 전통 예능인 노(能)·가부끼(歌舞伎) 등에서 소재를 얻어 「부콘(武魂)」·「오이와케(追分)」·「이케니에(生贄)」·「시즈고젠(靜御前)」 등을 발표했다.


해방 직전 중국에서 위문 공연을 하다 베이징에서 해방을 맞고, 1946년 5월 귀국했다. 친일 행적이 문제가 되어 남편 안막, 오빠 최승일과 함께 7월 20일 월북했다. 월북 후 평양에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설립하고 「반야월성곡」·「춘향전」 등 2편의 무용극과 소품 「노사공」 1편을 공연하는 등 창작 활동을 했다. 1950년 베이징에 중앙희극원 무용반을 설립해 학생을 지도했다. 1950년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조선무용가동맹중앙위원회 위원장, 무용학교 교장, 국립무용극장 총장 등을 역임했으며, 1952년 공훈배우·1955년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다. 1958년까지 최승희무용학교에서 안무가로 활동했으나 남편 안막이 반당종파분자 혐의로 체포되자, 그 영향을 받아 최승희무용연구소도 폐쇄되었다. 1년간 자숙 후 1959년 「영광스러운 우리 조국」을 창작해 조선무용가동맹 위원장으로 복귀, 1967년까지 활동했다. 1967년 숙청되어 가택연금의 처벌을 받았으며, 1969년 8월 8일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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