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장혁주 | 역자/편자 | 장세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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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 2023-11-20 | ||
ISBN | 979-11-5905-841-7 | ||
쪽수 | 349 | ||
판형 | 152*223, 무선 | ||
가격 | 17,000원 |
해방 이후 일본어 글쓰기를 선택한 작가 장혁주의 자서전적 소설
장혁주는 한국 문학사에서 그리 자랑스러운 이름은 아니다. 1905년 태어난 그가 학교 교육을 받을 무렵 일본어는 이미 공식 ‘국어’의 자리를 차지했고, ‘조선어’는 ‘한문’과 함께 외국어의 지위로 강등된 무렵이었다. 식민지 조선의 문인들은 이처럼 원했건 원하지 않았건 일본어-조선어를 동시에 사용하는 이중언어(bilingual) 사용자가 된다. 장혁주가 이중언어 1세대에 속하는 작가라는 것, 그가 식민지 시기 일본어로 가장 많은 수의 작품을 남겼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일본 제국이 잘 나가던 시절, 장혁주의 유명세는 조선과 일본을 훌쩍 넘어서는 것이었다. 장혁주처럼 일본어 글쓰기를 통해 동아시아 전역에 널리 ‘문명’을 떨치고 싶어 하는 식민지 출신 작가들이 생겨났고, 실제로 1930년대 대만의 ‘야심’ 있는 젊은 작가들에게 조선의 장혁주는 일종의 롤 모델이었다.
그러나 해방/패전 이후 상황은 급변하는데, 친일의 상징처럼 여겨진 장혁주는 조선 문단의 ‘공공의 적’이나 다름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1930년대 후반 이후라면 너나할 것 없이 거의 친일의 길에 들어섰던 조선 문인들이 장혁주를 비판의 표적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은 왜일까. 그것은 오히려 해방 이후 그의 행적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친일 경력을 가진 대부분의 조선 문인과는 달리, 민족에 대해 사죄를 표명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일본어 글쓰기를 선택하고 심지어 1952년 일본 국적으로 귀화까지 하는, 드문 ‘일관성’을 보였기 때문이다. 1954년 일본에서 발표된 장혁주의 소설 『편력의 조서』는 이처럼 독특한 선택을 거듭했던 작가 장혁주의 내면이, 거의 ‘고백’에 가까운 형식으로 담긴 자전적 소설이다.
여성 편력과 민족 편력의 이야기
‘고백’이라는 형식은 분명 고백하는 자의 진정성을 담고 있지만, 듣는 이의 입장에서 보자면 ‘고백’과 ‘변명’의 경계는 언제나 아슬아슬하다. ‘편력의 조서(調書)’라는 제목부터 실은 의미심장한데, 작가는 자신을 신문 당하는 ‘피의자’의 위치에 설정하고 과거의 과오를 고백하는 형식을 취한다. 그렇다면, 그의 과오란 무엇일까. 편력이라는 단어의 일상적 쓰임새대로, 이 소설은 작가 자신의 과거 ‘여성 편력’에 관한 내용이며 그는 자신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었던 다양한 여성들을 통해 자신의 삶의 일관된 서사를 구성해낸다. 말하자면, 일본으로 건너갈 수밖에 없었고, 일본어로 글쓰기를 하며, 일본인 아내의 성(姓)으로 귀화한 조선인 작가의 내면적 고투와 번민이라는 서사가 여성들과의 만남과 결별, 애착과 환멸의 반복되는 과정 속에서 서서히 완결되는 구조다.
그렇다면, 장혁주의 그녀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그녀들 중에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의 여류 문인들, 예컨대 작가 최정희의 동생인 “최정원”이나 장혁주와의 불륜으로 인해 법정 소송 직전까지 갔던 소설가 “백신애”가 실명으로 등장한다. 특히, 백신애와의 연애(1936) 직후 도망치듯 이루어진 그의 일본행은 당시 조선 문단의 떠들썩한 화제가 된 사건이기도 했다. 그러나 『편력의 조서』에서 가장 공들여 묘사된 여성은 실은 두 명으로 좁혀지는데, 두 여인이란 바로 장혁주의 어머니(생모), 그리고 일본인 아내 “게이코”라 할 수 있다. 기생 출신인 장혁주의 생모는 교양이나 품위와는 거리가 먼 여성으로, 그녀는 물질적인 욕망과 애욕을 드러내는데 거리낌이 없으며, 자식에 대한 애정과 소유욕 또한 주체할 수 없이 강렬했던 인물로 묘사된다. 어머니의 존재가 모든 열등감과 사회적 인정투쟁의 원천이었던 만큼, 작가는 평생 그녀로부터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면서도 육친인 그녀와의 친밀한 유대를 그리워하는 모순 속에서 괴로워한다. 그립지만 부끄러운 존재인 어머니. 그녀가 환기하는 감정은 장혁주에게 조국 조선이 불러일으키는 정념과 거의 유사한 것이었다.
반면, 일본인 아내 “게이코”는 작가에게는 거의 구원의 여성상에 가깝다. 그녀와의 연애를 통해 그는 일본이라는 나라를 추상 명사가 아니라 구체적 실감으로 비로소 마주하게 된다. 야심 찬 조선 출신의 젊은 작가에게, 일본 사회는 친절하지만 어딘가 곁을 내주지 않는 느낌이었다면, 이제 그녀를 통해 그는 ‘일본의 마음’을 비로소 얻게 되었다고 느낀다. 하나의 언어를 습득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낳은 지역을 알아야 하고, 그 지역이 낳은 사람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단지 아는 것만이 아니라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그는 작가로서 인생을 걸었던 ‘일본어 글쓰기’와 ‘귀화’라는 자신의 결단이 옳았음을, 더구나 그것이 행복한 선택이었음을 아내 게이코를 통해 거듭 확인하며 마침내 안도한다.
해방 이후 일본어 글쓰기의 행방
이처럼 『편력의 조서』는 조선이라는 과거를 ‘청산’하고 일본의 ‘보통 작가’로서 전후 일본 사회와 함께 새롭게 출발하려는 장혁주, 아니 노구치 가쿠츄(野口赫宙)의 오랜 소망의 기록인 셈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후 그의 글쓰기 행보를 보면 그 자신의 희원처럼 조선적인 것의 흔적으로부터 말끔히 벗어날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어 글쓰기를 수행했다는 점에서는 동질적이지만, 전후 일본에 계속 거주하되 ‘조선인’이라는 마이너리티로서의 정체성을 여전히 유지하려 했던 재일(在日) 작가들과 장혁주가 확연히 구별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실제로, 재일조선인 사회와 그의 갈등은 골이 깊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그의 일본어 글쓰기는 지금·여기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제국-식민지의 역사가 낳은 일본어 글쓰기는 해방 이후 한반도의 공식 기록에서는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1921년 생 김수영은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자신의 시 창작이 애초 일본어로 구상된다는 사실을 작품을 통해 정직하게 노출한 적이 있다. 일본어로 된 그의 이 ‘시작(詩作) 노트’는 해방 이후 한국 작가가 일본어로 기고한 유일한 사례였지만, 출판사 측의 배려(!)로 한국어로 말끔히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1966년의 일이었다. 이처럼 오랜 식민의 흔적인 일본어 글쓰기가 ‘해방/패전’을 맞은 전후 시간의 한쪽 편에서 빠르게 망각되어야만 했다면, 장혁주의 사례는 마치 거울상처럼 반대편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닐까. 그 자신의 기원이기도 한 혼종성을 깨끗이 삭제하려는, 역시나 불가능한 또 다른 극단의 지점에 장혁주의 전후 일본어 글쓰기가 놓여 있다.
책머리에
편력의 조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가게 앞에서 비를 그었다. 그곳 잡화점 여주인이 친절하게 맞아주었다. 마룻귀틀에 앉아 소나기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비는 억수같이 쏟아져 어느 가게 앞에도 사람으로 가득했다. 옷자락을 걷어 올린 아가씨들이 달려 지나갔다. 그중 한 사람이 버선을 벗고 샌들을 손에 들고 맨발로 철벅철벅 물보라를 일으키며 서둘러 지나갔다. 그 모든 것이 아주 친밀감 있게 보였다. 나는 이 친밀감이 어디서 온 것인지 알고 있었다. 내가 아직 고향에 있었을 무렵 그곳에 와 있던 이 나라 사람들과 우리는 같은 지역에 살고 있을 뿐 전혀 마음이 융합되지 않았다. 그것은 서로 상대의 생활과 담을 쌓고 멀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이 지역의 생활 속에 몰입해 있었다. 나는 바깥에서 이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지역 사람과 한마음이 되어 보고 있는, 적어도 보려 하고 있는 것이다. (77쪽)
다리를 건너자 그 사과 과수원은 바로 알 수 있었다. 국도와 철도에 끼인 위치에 3천 평 정도의 사과밭이 섬처럼 되어 있었다. 기와를 이은 일본풍 건물이 울창한 사과나무 숲 사이로 보였다. 짧은 치마에 하얀 즈크화를 신은 가벼운 차림의 신애가 한길에 서 있었다. 차가 멈추자 그녀는 배낭을 들고 탔다. “혼자인가요?” 나는 의아했다. “당신이 늦어서 버스로 먼저 출발하게 했어요.” 그녀가 대답했다. (219쪽)
나는 생모를 미워했지만 이치를 떠나 본능적인 슬픔을 느꼈다. 나는 그리스도교의 집회장에 가서 생모를 위해 기도를 드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전쟁 이래 그리스도교 교회는 쇠퇴하여 이 근처에서는 찾아볼 수 없어 그건 그만두었다. 피를 나눈 사람들이 마지막까지 서로 사랑하지 못했던 것이 무척 슬퍼져 신사 경내로 가서 사자상 뒤의 돌계단에 앉아 울었다. 하나뿐인 자식인데도 장례식에도 가지 못한 것이 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는 자신을 질타했다. (278쪽)
저자
장혁주 張赫宙, Chang, Heok-joo
1905~1998. 대구 출생. 1932년 일본 잡지 『개조(改造)』에 일본어로 쓴 소설 「아귀도(餓鬼道)」로 일본 문단에 등단하며 주목받았다. 「아귀도」는 식민지 조선 농민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그려 조선과 일본 문단 양쪽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후 서울과 도쿄를 오가며 조선어와 일본어로 창작했다. 그러나 조선어 작품에 대한 조선 문단의 반응에 만족하지 못한 데다 개인적인 사건까지 겹쳐 1936년경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쿄에서 ‘해방’을 맞이한 뒤 1952년에는 일본으로 귀화, 일본어 글쓰기를 지속했다. 식민지 시기 발표된 대표적인 한국어 작품으로는 「무지개」(1933~1934) 외에 『삼곡선(三曲線)』(1934)과 같은 장편소설이 있다. 한국전쟁을 취재해서 쓴 『아, 조선(嗚呼朝鮮)』(1952)으로 일본에서 성공적으로 재기했으며, 노구치 가쿠츄(野口赫宙)라는 필명으로 평생 꾸준히 작품 활동을 했다.
역자
장세진 張世眞, Chang, Sei-jin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교수. 연세대학교 국문과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1945년 이후 미국이 개입해서 형성된 동아시아의 냉전 문화에 관해 논문과 책을 써왔다. 저서로는 『상상된 아메리카』(푸른역사, 2012), 『슬픈 아시아』(푸른역사, 2012), 『숨겨진 미래-탈냉전 상상의 계보 1945~1972』(푸른역사, 2019), 역서로는 『냉전문화론-1945년 이후 일본의 영화와 문학은 냉전을 어떻게 기억하는가』(너머북스, 2010)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