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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회 한국미술 저작 출판상

이탈과 변이의 미술
1980년대 민중미술의 역사
저자 서유리 역자/편자
발행일 2022.12.10
ISBN 9791159057281
쪽수 529
판형 신국판 무선
가격 4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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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미술통치의 경계를 뚫어낸 아방가르드 미술

미술은 신비로운 명작이거나 철학적 암호이기만 한 것일까? 미술은 저마다 겪어온 생존의 체험을 서로 공유하는 과정이자 타인과의 만남을 매개하는 미디어이다. 미술이 어떻게 산산이 파편화된 개인을 연결하고 불가능할 것 같았던 변화를 위한 힘을 모아낼 수 있었을까. 이 책은 불의한 시대에 미술관 밖으로 탈출하여 연약한 타자인 우리 자신을 향해 변이해 나갔던 한국 미술의 역사를 추적했다. 서양의 어떤 미술의 역사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전대미문의 아방가르드가 1980년대의 민중미술이다. 민중미술은, 통치와 자본이 규율한 주체성과 장소성에서 벗어나 미술가가 시민 대중과 함께 세계를 바꾸어낼 힘을 만들어간, 이탈과 변이의 미술이었다. 

이 책은 다층적인 시점으로 민중미술의 역사를 재구성했다. 한국 사회의 격동의 시기였던 1980년대 초, 미술장의 구조가 재편되고 ‘현실과 발언’, 신학철, ‘임술년’ 등의 전위적 작가들이 극적으로 회화사적 전환을 이루어내면서 변화가 시작되었다. 전시장 안의 혁신에 이어서, 미술의 새로운 존재방식이 밖에서 실험되었다. 광주 ‘자유미술인회’가 같이한 시민미술학교의 검은 판화는 자율적인 표현과 탈계층적 만남의 순간을 매개했다. ‘두렁’이 창안한 걸개그림은 집회의 수행성과 결합하여 닫힌 주체성의 변이를 추동하고 사람들을 연결시켰다. 도처에서 여러 갈래의 만남을 기획하고 실현했던 미술가들의 활동은 1987년을 고비로 폭발적으로 확산되었다. 

이 책은 전시장 미술과 현장 미술의 두 갈래로 나누어 미술운동의 역사를 성찰하면서, 전시장 미술의 도전적인 시도와 현장 미술의 역동적인 활동을 교차시켜 살펴보았다. 미술가와 대중의 공동체적 미술활동이라는 특이점에 집중하고, 1980년부터 1990년대 전반까지 기원, 발전, 전환, 쇠퇴의 역사적 내러티브를 재구성하여 민중미술의 역사를 흥미롭게 따라갈 수 있도록 했다. 230여 개의 작품과 현장 이미지가 미술운동의 다양한 양상들을 풍부하게 보여준다.


치안을 넘어선 정치의 시도, 타자를 향한 변이의 실험

민중미술은 통치가 배분한 규율화된 자리를 이탈하여 타자를 향해 변이하는 감각의 정치를 감행한 미술이었다. 변화는 처음에 미술장 내부에서 시작되었고 점차 외부를 향했다. 미술가들은 반공주의적 국가 제도의 폐쇄회로와 모더니즘 추상에 갇혔던 한국 현대미술을 내적 금기에서 해방시키려 했다. 작가들은 다다, 팝아트, 하이퍼리얼리즘과 전통회화를 혼융하는 포스트모던한 방법을 가져와 사회, 현실, 역사, 공동체의 주제를 비판적으로 담아내는데 성공했다. 

미술의 개념적, 제도적 규칙이 흔들렸다. 미술관 밖으로 한 걸음 더 나간 미술가들은 여러 공간의 규율화된 장소성을 변이시키며, 대중과 만나 그림을 공동 제작했다. 판화와 걸개그림은 이 과정에서 선택, 창안된 새로운 방법이었다. 국가와 자본이 규정한 정체성과 장소성을 벗어나 변이하는 체험은 미술가만의 것이 아니었다. 학생, 노동자, 농민, 회사원, 주부 등 시민 대중도 저마다의 규격화된 자리를 벗어나 미술을 매개로 계층적 타자를 만나 잠정적인 공동체를 형성했다. 미술가와 대중이 그림을 매개로 통치가 세워놓은 감각의 질서를 뒤흔들자 역사가 진보했다. 


너와 내가 그려 나눈 작은 그림이 세상을 다르게 만든다타인을 향한 마음의 길, 민중

민중미술은 근본적인 차원에서 미술과 미술가의 존재 방식을 변이시키고 확장시킨 미술이었다. 미술은 미술관 안에 고요히 전시되어 수동적 감상의 대상이 되기를 그만두고, 미술관 밖으로 나가 성당, 교회, 공장, 거리, 광장에서 사람들을 연결시키고 모아내는 미디어로 변이했다. 전시제도에 갇혔던 미술가는 이를 벗어나 다양한 시민들과 만나 평등의 유토피아를 담은 그림을 그려 걸었다. 대중과 미술가는 그림을 통해서 국가와 자본이 규정한 자신의 정체성에서 벗어나는 시도를 감행했다. 이러한 시도는 한국의 미술사에서 새로운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단어 ‘민중’은 한국의 미술가와 대중이 규율화된 주체성을 이탈하여 타자를 향해 흘러가는 통로, ‘유로(流路)’와도 같았다.


미술사로 복원한 현장 미술, 민중미술의 새로운 역사 쓰기

이 책은 민중미술의 역사를 새로운 관점과 풍부한 자료를 종합하여 다층적으로 서술했다. 미술장의 구조와 제도적 변화에 주목하고 일반인의 미술작업과 현장미술 활동을 폭넓게 종합하면서 미술운동을 재구성했다. 모더니즘 추상을 벗어나 방법과 주제를 혁신한 작가들의 전위적인 시도는 197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민간 자본에 의한 제도의 재편과 이에 따른 미술장의 구조적 변동과 관련지어 분석되었다. 

이 책은 천재적 작가의 일대기와 명작의 예술성에 집중하는 정통적인 미술사의 서술방식을 벗어나, 시민미술학교에서 처음 판각 기술을 배운 일반인들의 소박한 판화와 동료와 가족을 그린 노동자들의 따뜻한 걸개그림에 눈을 돌렸다. 미술관 밖에서 이루어진 현장 미술은 미술시장에서 유통되지도, 미술관에서 수집되거나 전시되지도 않는, ‘정상적인’ 미술의 타자들이다. 이를 복원하여 민중미술의 중심축에 놓음으로써, 이 책은 1980년대 미술운동이 작가와 대중들의 역동적이고 창의적인 활동 가운데서 가능했다는 사실을 드러내려 했다. 

민중미술은 오늘날의 미술의 관점에서 본다면 기이한 미술, 괴물 같은 미술일지도 모른다. 이 낯선 미술의 역사, 한국 미술 자신의 역사를 끄집어내어 들여다보는 작업을 통해서 오늘날 닫혀버린 현재의 외부, 바깥을 상상하는 힘을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자세히 보기

제1장에서는 1983년까지의 전시장 미술의 흐름에 주목했다. 모더니즘 미학과 예술론에 갇힌 미술을 넘어서, 사회, 역사, 공동체를 주제로 삼아 인문학적, 사회학적 지성과 포스트모던한 미술의 방법으로 반공주의 국가의 감각적 규율을 해체시킨 회화사적 전환 과정을 살펴보았다. 그룹 ‘현실과 발언’, 작가 신학철, 그룹 ‘임술년’이 등장하여 도전적인 그림을 발표해 나갔던 과정이 민간 자본에 의한 미술장의 제도 변동과 연계되어 서술되었다.

제2장에서는 미술관 밖의 미술의 핵심적 매체인, 판화와 걸개그림이 등장한 과정을 소개한다. 광주 ‘자유미술인회’의 작가들이 시도한 시민미술학교에서 대중들은 검은 판화를 제작하면서 공동체적 만남을 기획했고, 미술동인 ‘두렁’은 현장 미술의 기원이자 집회의 수행성과 혼융되는 걸개그림을 창안했다.

전시장 미술과 현장 미술이 결합되는 순간, 통치 권력이 이를 단속하였고 전선이 형성되었다 반공주의에 침윤된 관료와 평론가들은 정치 이데올로기 미술이라는 비판으로 몰아붙였다. 제3장에서는 이에 대항하여 국가와 자본의 외부에 설립된 자율적 단체인 민족미술협의회가 결성되는 과정과 청년 작가들의 다채롭고 실험적인 기획전을 소개했다. 

제4장에서는 1986년부터 1989년까지, 여러 장소에 걸려 대중의 주체성을 변이시키고 변화를 추동시켰던 걸개그림과 벽화의 제작사례와 집회의 수행성을 추적했다. 평등의 유토피아가 담긴 노동자 걸개와 역사적 변혁의 주인공으로 재현된 대학생 걸개그림은 변이하는 주체성의 정점을 표현했다.

제5장에서는 민미협의 미술 활동을 살피면서, 전시장 미술과 현장 미술의 갈등 및 현장 미술 내부의 방법적 대립 양상을 짚었다. 1987년 이후 전국적으로 지역미술단체들과 민미련이 설립되면서 시민 대중과 광범위하게 연계하는 미술가들의 활동이 일어났다. 여성주의 미술이 본격화되고 민중미술 해외전이 개최되면서 성공의 정점에 도달했던 1989년의 비평적 정리작업까지 살펴보았다.

1990년대 전반, 통일과 노동을 화두로 통치의 경계를 뚫어내려 한 미술운동은 강력한 제재에 부딪혔고, 내적 경직화의 징후를 보였다. 통치의 단속 가운데 전시장과 미술시장으로 수렴되며 사그라들었던 미술운동의 마지막을 제6장에서 살펴보았다.

책머리에 


서론

치안을 넘어선 정치의 시도-헤테로토피아의 창출

현장미술 중심의 역사 서술

미술장의 구조변동과 미술운동


제1장 : 미술장의 재편과 ‘신형상회화’의 등장   


1. 《그랑팔레전》과 모더니즘의 위기     

   

2. 의도된 전환 - 『계간 미술』, 민간자본 공모전의 등장, 김윤수의 평론 

1) 반추상 담론의 등장 - 김윤수의 「한국 추상미술의 반성」

2) 민간자본에 의한 미술장의 구조 변동 - 『계간 미술』, 언론사 공모전, 미술시장의 형성과 화랑의 증가

3) ‘새로운 형상성’ - 동아미술제와 중앙미술대전, 하이퍼리얼리즘의 유행


3. 현실과 발언, 신학철, 임술년 - 1983년까지의 새로운 시도들 

1) 현실과 발언의 등장 - 대중매체와 콜라주

2) 현실과 발언의 안착 - 『계간미술』과 서울미술관

3) 신학철 - 포토몽타주, 하이퍼리얼리즘, 반역사 

4) 임술년 - 하이퍼리얼리즘과 현실의 만남, 서글픈 소외, 폭력적 자본, 쓸쓸한 노동


제2장 : 미술관 밖의 미술, 이탈과 변이의 미술 - 판화와 걸개그림의 등장      


1. 검은미디어, 감각의 공동체 -  판화의 등장과 시민미술학교의 시작  

1) 판화의 선택, 1980년대 판화붐의 기원 - 1970년대 후반 1980년대 초반의 출판물

2) 시민미술학교 - 타자와의 만남의 매개로서의 판화                

3) 판화학교의 확산 - 노동자 야학과 대학의 판화교실             

4) 《민중시대의 판화전》 - 미술의 민주화              


2. 장소의 이탈과 주체의 변이 - 걸개그림의 등장                       

1) 수행성과 그림의 결합 - 미술집단 ‘두렁’의 벽화와 탱화

2) 실내집회에서의 그림들 - 헤테로토피아의 생성과 미술의 변이

3) 굿그림 - 1985년의 실내집회의 그림들


제3장 : 판의 열림과 전선의 형성 - 1984~85년의 새로운 기획전들과 민미협의 결성 


1. 판의 열림과 운동으로의 전환 - 《삶의 미술전》, 《시대정신전》, 《해방40년 역사전》

1) 서로 다른 흐름의 만남 - 《삶의 미술전》

2) 출판을 통한 네트워킹, ‘시대’의 문제화 - 《시대정신전》

3) 대학 광장 전시의 시작, 민중미술의 부상과 쟁점화 - 《해방 40년 역사전》


2. 전선의 형성과 자율적 제도의 설립 - 서울미술공동체, 《20대의 힘전》, 민족미술협의회의 결성  

1) 미술의 남대문시장을 열다 - 서울미술공동체의 《을축년 미술대동잔치》

2) 형성되는 전선, 시민적 제도의 설립 - 《1985년 한국미술 20대의 힘전》, 민족미술협의회의 결성, 『민중미술』의 발행


제4장 : 광장과 거리에 나선 미술 - 1986-89년의 걸개그림과 벽화 


1. 그림, 광장과 거리에 나서다 - 1986년의 벽화와 1987년 광장의 걸개그림들

1) 1986년 실내 집회의 걸개그림과 벽화의 도전

2) 1987년, 광장과 거리의 걸개그림


2. 이탈하는 노동자 - 노동집회의 걸개그림, 역사의 주인공을 그려내다   


3. 변이하는 대학생 - 성조기를 찢고 통일을 말하다                   

1) 자아의 사회적 확장 - 대학의 벽화와 걸개그림

2) 분단의 경계를 넘어서다 - 1988~89년의 대학 걸개그림과 〈민족해방운동사〉


제5장  : 확산되는 민중미술 - 민미협의 분화, 민미련과 지역미술단체, 여성주의 미술, 해외 전시 


1. 민족미술협의회의 활동 - 전시장 미술과 현장 미술의 공존과 분화   

1) 그림마당 민의 전시들, 《반고문전》과 《통일전》 외 - 정치적 비판과 통일의 지향

2) 노선의 대립과 분화 - 전시장 미술에서 현장 미술로, 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의 결성

3) 민미협의 현장미술 집단 - 엉겅퀴와 활화산


2. 지역미술단체의 설립과 민중미술의 확산 - 광주, 부산, 대구, 경기의 미술단체들과 민미련 

1) 광주의 시각매체연구소와 광주전남미술인공동체, 《5월미술전》

2) 부산, 대구의 미술운동 단체 - 낙동강, 부산미술운동연구소, 우리문화연구회

3) 경기지역 미술단체들 - 안양 우리그림, 인천 민미협, 수문연 나눔, 《노동의 햇볕전》  


3. 여성주의 미술과 해외 민중미술전    

1) 여성주의 미술과 여성노동미술의 등장 - 《여성과 현실전》

2) 해외의 민중미술전 - 일본, 캐나다, 미국


제6장 : 거리와 광장에서 전시장과 미술시장으로   


1. 1990년대의 현장미술 - 80년대의 부정과 90년대로의 전환   

1) 노동미술의 전환과 장르화

2) 1991년, 다시 거리와 광장의 미술

3) 통치를 넘어, 통치에 의해 - 서울민미련의 통일미술과 구속, 민미련의 해체


2. 전시장 미술로 - 미술시장의 확대와 국가의 흡수    

1) 생계의 문제와 미술가적 정체성

2) 미술시장에서의 성공과 국립미술관에서의 전시 


결론     


민중미술의 역사 - 이탈과 변이의 미술을 추적하기

민중미술의 성과와 의의

타자를 향한 미술, 역사로 기억하기


참고문헌   

도판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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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 「책 머리에」 중에서

한국의 20세기 미술사에서 1980년대만큼 미술이 정상성을 이탈한 시기가 있을까. 괴물 같은 그림들이 걸렸던 시대였다. 말할 수 없도록 하는 통치, 보일 수 없도록 만드는 치안의 경계를 넘어 미술이 흘러나갔다. 역사와 사회를 관통하는 그림의 전시에서, 보잘것없는 검은 판화들을 새기는 과정에서, 소박한 희망을 담은 걸개그림에서, 민중이라는 유로를 타고 흘러가는 미술의 흐름들이 모였을 때 거리와 광장을 가로막는 통치성의 강고한 벽이 무너졌다. 미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그것은 너와 내가 작은 그림을 그리고 나누는 과정을 통해서가 아닐까. 민중미술은 그 변화의 가능성을 역사 속에서 실현했던 미술이었다.


p.4 「책 머리에」 중에서

이 책에서는 민중미술의 역사를 쓰면서, 1980년대의 한국의 미술가와 대중이 미술의 역할과 존재 방식을 근본적인 차원에서 변이시키고 확장해 나갔던 과정을 담으려 했다. 미술의 영역 내부에서 일어난 혁신에 주목하면서 외부를 향한 이탈의 과정을 함께 추적해 나갔다. 흔히 시위 현장의 걸개그림은 예외적인 미술이자 비미술로 간주된다. 일반인들의 판화는 작가의 작품이 아니기 때문에 매매되거나 전시되지 않고, 미술사의 대상으로도 삼지 않는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이러한 작업을 미술사 서술의 중심에 두려고 했다. 더 나아가 그것이 민중미술의 한 본질이자 의미있는 미술활동이었다는 점을 밝히고자 했다.


p.17 「서론」 중에서

한국에서 현대미술의 존재 방식은 목적론적이었다. 당대 서구의 최신 미술 양식과 방법을 체현한 작품을 완성도 높게 제작하는 것이 작가들의 첨예한 경쟁과 도전의 과제였다. 해외의 미술제와 전시에 참여하는 것은 학습의 과정이자 작품의 완성도를 평가받는 최종적인 마침표였다. 추상의 여러 갈래들과 개념미술, 설치와 퍼포먼스로 이어지는 서양의 전위적 흐름들이 직접, 간접으로 수용되고 시도되었다. 현대미술을 주도했던 미술가들은 한국 미술문화의 발전을 선도하는 엘리트로서의 자의식과 의무감을 가졌다.


p.20~21 「서론」 중에서

정치사회적 금기를 넘는 주제를 담으며 출판물에서 걸개그림까지 미디어적 활용을 극단적으로 확장한 시도는 한국미술에서는 전대미문의 것이었다. 모더니즘의 추상과 소수의 미학적 주제의 한계에 갇혔던 미술의 주제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 실험되었다. 때문에, 1980년대의 미술운동에서 보여준 이미지들을 모더니즘과 도식적 이분법의 짝을 이루는 리얼리즘으로 규정짓는 것은 미술사적 사실과도 다르며 지혜롭지도 못한 일이다. 오히려 다양한 양식과 방법들이 포스트모던하게 혼융되면서, 한국 미술이 그간 억압했던 주제적 한계를 극한까지 밀고 나가, 삭제된 것을 가시화하며 상상할 수 없었던 변이의 이미지들을 만들어냈던 것이 민중미술이었다. 우리가 지금 이미지로써 자유로울 수 있다면, 그것은 1980년대의 미술운동을 거치면서 가능해진 것이다.


p.501 「결론」 중에서

1980년대의 미술은 독특하고 기이했다. 낯설고 서툴고 거친 이 그림들은 매끄러운 상품광고와 완성도 높은 명작의 미감을 역행했다. 이 형상들은 국가와 자본이 부여한 정상성을 이탈하는 미술가와 대중의 깊숙한 충동을 가시화한 것이었다. 이 충동이 미술을 통해 표출됨으로써 역사가 변화할 수 있었다. 미술이 미술관 밖으로 나옴으로써, 미술가가 자신의 정체성을 변이시켜 대중과 만남으로써, 대중의 충동이 만들어낸 이탈과 변이의 형상들이 가시화될 수 있었다. 통치와 치안이 배제한 것들을 불러내고 가시화하는 작업을 통해서 미술은 자신의 타자와 만나 스스로를 해방시키고 역사를 변화시킬 수 있었다.


p.501 「결론」 중에서

1980년대의 민중미술이 사회를 변화시키는데 성공했다면 그 원인은 타자성의 추구에 있었다. 미술가는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훼손시키며 타자를 향해 이탈하고 변이함으로써 사회를 변화시키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민중’은 이탈하고 변이하는 미술이 타자를 향해 흘러나간 통로였다. 주어진 미술의 규율과 법칙을 의문시하고, 정체성에 충실함으로써 얻는 이득에 구속되지 않으며, 규범적 동일성에 역행하여 타자를 향하는 흐름을 만들어내는 근원에는 강하고 순수한 희망과 믿음이 있었다. 21세기의 현재에, 타자성을 향한 희망과 믿음이 다시 한번 반복될 수 있다면, 그 방법과 양상은 1980년대와는 다른 어떤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변화를 추동시키는 근원은 여전히 동일한 것이 아닐까.

서유리  徐有利, Seo Yuri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책임연구원. 한국의 20세기 미술의 역사를 연구하면서 대중매체의 시각문화를 탐색해왔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의 고고미술사학과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잡지의 표지를 통해 이미지의 일상적 삶을 연구하고 『시대의 얼굴: 잡지 표지로 보는 근대』(2016)를 썼다. 한국 사회와 미술의 존재 방식을 변화시킨 1980년대 미술운동에 관심을 갖고 연구해 왔다. 2016년에 김복진 미술이론상을 받았다. 영남대, 광운대, 서울대 등에서 강의해 왔고,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의 학술이사로 있으며,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의 책임연구원으로 공부하고 있다. 논문으로는 「전위의식과 한국의 미술운동」, 「딱지본 소설책의 표지 디자인 연구」, 「한국 근대의 기하학적 추상 디자인과 추상미술 담론」, 「1980년대의 걸개그림 연구: 수행성, 장소, 주체의 변이」 등이 있고, 공저로는 『시대의 눈』, 『한국미술 1900-2020』, Interpreting Modernism in Korean Art: Fluidity and Fragmentation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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