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후지와라 가즈키 | 역자/편자 | 박용준 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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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 2023.05.20 | ||
ISBN | 979-11-5905-754-0 | ||
쪽수 | 389 | ||
판형 | 152*223, 무선 | ||
가격 | 27,500원 |
일본인 70명이 한국전쟁에 투입되었다
1950년, 북한의 남침으로 전쟁터가 된 한반도에 일본인 70명이 들어왔다. 이들은 미군과 동행하면서 실탄을 지급받아 직접 북한군 및 중국군과 교전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후 미군 당국은 오히려 일본인 요원들을 엄중히 심문했으며, 이들의 존재 및 활동을 극비에 부치는 등 사실을 은폐했다.
그 과정에서 1,033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일급비밀(TOP SECRET) 문서가 작성되었는데, 기밀에서 해제된 후 일본계 호주인 교수가 최근에 그 존재를 파악하였다. 해당 교수와 접촉한 NHK 보도국의 후지와라 가즈키(藤原和樹)는 이 문서를 바탕으로 생존한 일본인 요원 또는 유가족들을 취재하였다. 그에 따라 70명의 일본인들은 누구였고, 어떻게 한반도로 들어왔으며, 무슨 임무를 맡았는지, 또한 전투원으로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심문까지 받고 수십 년간 실상마저 감춰진 이유가 비로소 밝혀지게 된다.
한·일 관계의 가장 불편하고도 복잡한 역사
일본인들이 한국전쟁에서 미군을 도와 직접 전투에 나섰다는 사실은 일본에서나 한국에서나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한다. 태평양전쟁으로 패망한 일본인들에게 한국전쟁은 ‘조선 특수(朝鮮特需)’라 불리는 전후 부흥 서사의 시작이자 일부였다. 그들은 경제 부흥으로 번영과 안정을 누리는 가운데, 전쟁을 일으키거나 개입하지 않겠다는 ‘평화헌법’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런 일본인들에게 자국 출신 요원의 한국전쟁 참가는 불편한 사실이다. 이는 일본이 ‘평화헌법’ 체제의 이면에서 이미 전쟁에 직접적으로 관여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한, 광복 이후 오늘날까지도 일제 강점기의 개인적, 집단적 기억이 지속되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한국전쟁의 기억은 국군과 유엔군의 분전에 주목하는 견해, 아니면 동족 상잔에 주목하는 견해로 양분되어 있다. 이와 같은 여건에서 일본인 요원들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어렵다. 그것이 한국전쟁을 둘러싼 주요 논쟁으로부터 동떨어져 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민족주의적인 입장에서 볼 때 일본인들은 그저 한국전쟁을 이용하기만 했을 뿐이어야 하며, ‘희생’되기까지 했다는 것은 한국전쟁의 ‘숭고하거나’ 혹은 ‘가슴 아픈’ 서사를 ‘더럽히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이 한국전쟁의 지상전에 참가했다는 사실은 오늘날의 우리에게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이들 일본인을 바라보는 관점을 정립하기도, 그에 따른 평가를 내리기도 곤란하지만, 그것이 바로 한·일 관계의 복잡함을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이것은 우리의 미래가 될지도 모른다
일본인들의 한국전쟁 참가는 전후 일본 정부가 미군의 점령 상태에 놓인 가운데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그와 같은 구조는 이제 한국과 미국의 관계에서 재현되고 있다. 그리고 한국은 미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한반도 위기에 대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한국이 인도·태평양에서의 미국 패권 동요에 대응하는 국면으로 전환되고 있다.
한국은 세계 최대 규모의 해외 미군 기지가 위치한 가운데, 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 및 타이완 해협 위기의 심화 속에서 군사적 역할을 요구받고 있다. 과연 한국은 미국의 전쟁 수행에 협력하게 될 것이며, 그때 시민들 개개인의 삶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리고 그때 한국은 자신들이 참전하게 될지도 모르는 전쟁에서 각국 정부 및 시민들 개개인과 어떤 관계를 형성하게 될 것인가. 한국전쟁 시기 미국과 일본의 관계, 그 사이에 운명을 내던졌던 일본인들의 삶은 어쩌면 우리의 미래가 될지도 모른다.(박용준ㆍ번역자)
프롤로그 그들은 역사로부터 지워졌다 7
제 1장 1,033쪽의 극비 심문 기록 15
한국전쟁의 간략한 역사 17
한국전쟁은 일본에서 어떻게 알려졌는가 20
퍼즐 같은 1,033쪽 22
미군 기지의 섬, 일본 26
다카쓰 겐조 발견 27
남겨진 회고록 31
소년 시절 일본군에게 품은 불신 35
세계 최빈국, 일본 39
미군 장병은 상냥했다 41
점령군 기지에서 보낸 나날 42
밀항하여 한반도로 44
“많은 사람이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46장진호 전투 49
퇴각, 그리고 귀국 52
“다시 한번 한반도에 가고 싶나?” 54
‘최고 기밀’이 된 일본인들 56
누락된 역사 58
제2장 대전 전투_후쿠오카에서 한반도로 향한 사나이들 61
가장 많은 일본인이 참가한 대전 전투 63
우에노 다모쓰를 찾아서 65
군사도시, 고쿠라 68
아들과의 해후 69
캠프 코쿠라에서 일한 두 남자 71
대전에서 살아남은, 두 사람의 전직 미군 장병 75
대전은 ‘완전한 카오스’였다 80
싸워야 할 이유는 동료의 죽음에서 생겨난다 86
“피난민을 죽였다” 전직 미군 병사의 증언 88
제34보병연대의 궤멸 90
대전에 있었던 니시토자키의 일본인들 92
히라쿠라 요시오 “이렇게 죽는구먼” 95
이노우에 준이치 “미군과 똑같이 취급받았다” 98
아리요시 다케오 “대전에서 함정에 빠졌다” 102
아리요시 다케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104
야마사키 마사토 “전쟁…… 무섭습니다.” 108
우에노의 그 후, 딘 소장과의 재회 110
아들은 무엇을 이야기했는가? 112
제3장 고아들은 미국을 동경했다 115
일본의 고아들 117
열두 살에 전장에 선 일본인 120
두 차례의 대전에 농락당한 소년 123
“그는 공산주의자를 증오했습니다” 126
여동생과 생이별, 그리고 귀국 128
다시 한반도로 133
일본인 포로, 쓰쓰이 기요히토 135
쓰쓰이가 귀국한 사실은 어떻게 보도되었는가? 138
너무도 상냥했던 오빠 139
특공 훈련생 142
“미국, 이 새끼들” 149
‘모험심’으로 갔다 150
수용소에서 벌어진 학살 152
수용소에서 보낸 편지 155
귀국 후에 기다리고 있었던 것 157
쓰쓰이는 미국인이 되었다 159
어머니를 향한 마음 162
제 4장 그들은 왜 이용되었는가_일본·미국·한국의 의도 165
전부 미국의 오산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67
실전 경험 없는 젊은이들 170
통역 사와가시라 로쿠조 173
상관의 권유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175
“당신들이 처음이랍니다” 178
인원 부족 메우기 179
일본인도 ‘공식으로’ 표창받았다 181
미군 통역이 밝힌, 심문이 행해진 이유 182
전승국의 교만 186
“정신적으로 협력한다”187점령군을 위해서인가,
유엔군을 위해서인가 190
경찰예비대로 오라는 권유 192
해상보안청에 의한 기뢰 소해 194
“전투에 종사한 것이 아니라, 소해에 종사했다” 198
일본의 독립과 조선 특수 200
일본에 남은 유엔군 후방사령부 203
북한·소련의 항의 205
일본에서 행해진 한국군 병사의 극비훈련 207
일본의 전쟁 협력을 인정할 수 없었던 한국 210
새로운 한일관계를 위하여 213
북한과 국교 정상화를 할 수 없는 이유 215
제5장 평화헌법하의 해상수송_선원들의 전후사 217
22개의 빈 유골함 219
636호의 리더, 가토 게이지 221
두 차례의 침몰과 공습에도 살아남다 223
636호에 승선 225
은폐된 아버지의 죽음 228
위령제의 조사230생존자, 마쓰시타 아키라 233
636호는 침몰했다 235
남겨진 선원명부 238
일·미 당국은 어떻게 인식했는가 239
가나가와현의 갈등 243
유골 없는 무덤 245
LST 선원, 산노미야 가쓰미 247
허허벌판이 돼 버린 고향, 한국 250
“일본인이 여기에 있잖아!” 253
해상 수송은 베트남전쟁에서도 행해졌다 255
“헌법 9조 위반이 아니다” 259
베트남전쟁에서도 일본인 선원이 희생되었다 261
활용되지 못한 한국전쟁의 교훈 264
이라크 파견267자위대와 민간 페리 270
제6장 어느 일본인의 전사 273
Killed in action’그 사진 속에서는 총을 들고 있었다 278
가족의 자랑이었던 히라쓰카 시게하루 279
죽어도 돌아오지 못하는 뉴기니 281
페인트공 네오 히라쓰카 284
부고286다카쓰의 발견과 히라쓰카의 전사 289
범죄자 취급을 당한 아들 291
일·미합동위원회 각서 295
봉인해두었던 형에 대한 마음 300
행방불명자, 요시하라 미네후미 302
일본인 취사병 셋 303
만철에 있었던 세키 마사하루 306
요시하라의 죽음에 보이는, 은폐의 구도 307
“전쟁이라는 것은, 좋지 않아” 311
‘성벽으로 둘러싸인 마을’은 어디인가? 313
히라쓰카와 같은 부대원이었던 제이 히다노 319
맥클레인 대위의 수기 322
9월 4일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324
“그는 범죄자 따위가 아니야” 327
한국으로32869년만의 재회 333
역사에 묻힌 ‘최초의 전쟁 협력’ 336
후기 339
연표 344
번역자의 말 347
주석 382
생전에 요시노리 씨는 형 히라쓰카가 한국전쟁에서 죽었다는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스스로 꺼낸 적이 없었다. 다만 사치코 씨에게는 결혼해서 함께 산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 형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 그리고 어린 시절에 형을 동경했다는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있다.
“남편은 줄곧 아주버님이 죽은 이유를 알고 싶어했습니다.”
요시노리 씨가 죽은 뒤에도, 사치코 씨는 남편의 유지를 잇기 위해 히라쓰카와 관련된 물건들을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요시노리 씨가 고이 간직해 온 사진 한 장이 있다. 한국전쟁 시기에 찍힌 것이라고 한다. 가족사진의 군복 차림과는 전혀 다르게, 러닝셔츠 차림에 머리를 짧게 깎은 청년이 강기슭의 숲에 서 있다. 신문에 게재된 사진과 같은 것이다.
신문에서는 해상도가 낮아서 확실히 보이진 않았지만, 히라쓰카의 손에는 총이 들려 있었다. 이 사진은 언제, 어디서 찍혔을까? 사치코 씨도 자세한 것은 알지 못했다. (278쪽)
지은이
후지와라 가즈키 藤原和樹, Fujiwara Kazuki
2009년 NHK에 입사했으며 현재 보도국 사회프로그램부 디렉터이다. 주요 담당 프로그램으로는 NHK 스페셜 <김정은의 야망 1집-폭군인가 전략가인가 금단의 실상>, <클로즈업 현대+시리즈 -미국 중간 선거 ① 알려지지 않은 트럼프식 SNS 전략>, <NEXT 미래를 위하여-헌화 그 앞에서 가와사키 중학교 1학년 남자 살인 사건> 등을 기획했다. 공저로 『AI vs. 민주주의』(NHK출판 신서), 『사토미 자본론』(카도가와 신서)를 펴냈다.
옮긴이
박용준 朴龍準, Park Yong-jun
2013년 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문화체육관광부의 영화인문학 교육을 수료하고 역사와 관련된 책, 영화 등 다양한 미디어를 소재로 연구 및 집필 활동을 계속하였다. 전라남도에서 첫 교편을 잡았으며, 현재는 광주광역시에서 중등 역사 교원으로 근무하면서 한국과 일본 간의 역사교육 교류, 주변국과의 역사 분쟁에 관심을 갖고 관련 연구회 및 관계기관에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