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황정견 | 역자/편자 | 박종훈, 박민정, 이관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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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 2024-08-15 | ||
ISBN | 979-11-5905-915-5 | ||
쪽수 | 396 | ||
판형 | 152*223 양장 | ||
가격 | 30,000원 |
송시다운 시가 시대, 그 중심에 있던 황정견
송나라는 개국(開國) 왕조인 태조부터 인종조(仁宗朝)를 거치면서 만당(晩唐)·오대(五代)의 장기간 혼란했던 국면이 정리되어 나라가 안정되었고, 백성들의 생활환경 또한 비교적 안정을 찾게 되었다. 전대(前代)의 가혹했던 정세가 완화됨에 따라 농업이 급속도로 발달하였고, 안정된 농업의 경제적 기초 위에서 상공업이 번창하고, 번화한 도시가 등장하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전대에 비해 상당한 풍요를 구가하게 되었다. 이처럼 사회 전체가 안정되고 발전함에 따라 일반 백성들은 단조로운 것보다 복잡하고 화려한 것을 추구하게 되었다. 시대적·사회적 환경은 곧 문학 출현의 배경이고, 문학은 사회생활이 반영된 예술이라고 할 만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유협(劉勰)이 “문학의 변천은 사회 정황에 따르다[文變染乎世情, 興廢繫乎時序]”고 한 것처럼, 사회의 각종 요인은 문학적 현상을 결정하기 때문에 이러한 요소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문학 풍조의 변혁을 동반한다. 송초 시체(詩體)의 변천은 이러한 사실을 보여주는 객관적인 증거이다. 특히 송대에는 일찍부터 학문이 중시되었다. 이는 주로 군주들의 독서열과 학문 제창으로 하나의 사회적 풍조로 자리 잡게 되어 송대의 중문중학(重文重學)적 분위기가 마련되었다.
황정견은 바로 이때 전성기를 구가하여 북송(北宋)을 대표하는 시인이다. 중국시가의 최고 전성기라 할 수 있는 당대(唐代)를 뒤이어 등장한 북송의 시인들에게는 당시에서 벗어난 송시만의 특징을 만들어 내야 하는 일종의 숙명이 있었다. 이러한 숙명은 북송 초 서곤체에 의해 시도되었으며 북송 중기에 이르러 비로소 송시다운 시가 시대를 풍미하기에 이르렀다. 황정견이 그 중심에 있었다.
후대까지 영향을 미친 황정견의 시론
황정견은 시를 지을 때 시의 표현을 다지고 시법을 엄격히 지켜 한 마디 한 글자도 가벼이 쓰지 않았다. 황정견은 수많은 대가들을 본받으려고 했지만, 그중에서도 두보(杜甫)를 가장 존중했다. 황정견은 두보 시의 예술적인 성취나 사회시(社會詩) 같은 내용 측면에서의 계승보다는, 엄정한 시율과 교묘(巧妙)한 표현 등 시의 형식적 측면을 본받으려 했다. 황정견 시론의 요점을 정리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시의 조구법(造句法)으로서의 환골법(換骨法)과 탈태법(奪胎法)이다. 이에 대해 황정견은 “시의 의미는 무궁한데 사람의 재주는 한계가 있다. 한계가 있는 재주로 무궁한 의미를 좇으려고 하니, 비록 도잠과 두보라고 하더라도 공교롭기 어렵다. 원시의 의미를 바꾸지 않고 그 시어를 짓는 것을 환골법이라고 하고, 원시의 의미를 본떠서 형용하는 것을 탈태법이라고 한다[詩意無窮, 而人才有限. 以有限之才, 追無窮之意, 雖淵明少陵, 不得工也. 不易其意而造其語, 謂之換骨法. 規摹其意而形容之, 謂之奪胎法]”(『시인옥설(詩人玉屑)』)라고 한 바 있다. 이로 보건대, 황정견이 언급한 환골법은 의경을 유사하게 하면서 어휘만 조금 바꾼 것을 일컫고, 탈태법은 의경을 변형하여 사용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진부한 표현이나 속된 말을 배척하고 특이한 말과 기이한 표현을 추구했다. 구체적으로는 술어를 중심으로 평이한 글자를 기이하게 단련(鍛鍊)시켰고 조자(助字)의 사용에 힘을 특히 기울였으며, 매우 궁벽하고 어려운 글자를 사용했고 기이한 풍격을 형성하기 위해 전대(前代) 시에서 잘 쓰지 않던 비속(非俗)한 표현을 시어로 구사하여 참신한 의경을 만들어내곤 했다.
셋째, 전고(典故)의 정밀한 사용을 추구했다. 이는 황정견 시론의 “한 글자도 유래가 없는 것은 없다[無一字無來處]”와 연관된다. 강서시파는 독서를 중시했는데, 이것은 구법의 차원에서 전대 시의 장점을 수용하기 위한 것이지만, 이는 전고의 교묘(巧妙)한 활용이라는 결과로 표현되기도 했다. 그러면서 전인의 전고를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자신의 의도에 맞게 변용했다.
이와 같은 황정견의 창작법에 대해 부정적 평가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 평가는 황정견 시의 파급력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황정견을 중심으로 한 강서시파가 당대(當代)는 물론 후대 및 조선의 문인들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황정견의 시를 세밀히 소개하다
황정견은 현존하는 가장 공신력 있는 중화서국(中華書局)본에 따르면 총 1,916수의 시 작품을 남겼다. 북경(北京) 중화서국(中華書局)에서 2007년에 출간한 전 5책의 『황정견시집주』에는 총 1,260제(題) 1,916수(首)의 시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황정견 작품의 구절 및 시어(詩語) 하나하나가 갖는 전례와 창작배경 그리고 구절의 의미 및 전체적인 의미를 상세하게 주석을 통해 소개해, 황정견 작품의 세밀한 이해를 돕고 있다. 이 책에서는 『황정견시집주』에 소개된 모든 주석을 꼼꼼하게 번역하였으며, 주석의 내용을 시의 자구(字句) 해석에 최대한 반영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황정견 시가 워낙 난해하여, 경우에 따라서는 주석이 시 본문과 어떤 연계성이 있는지조차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이러한 경우에도 연결 관계를 최대한 찾아 시 본문 번역에 녹여내고자 노력하였다.
황정견에 대한 연구는 지금까지 꾸준히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아직까지 황정견 시 작품에 대한 전체적인 번역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구체적인 실상의 일면만을 위주로 하거나 혹은 피상적으로 연구가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이에 상세한 주석을 통해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돕는 『황정견시집주』에 대한 완역은, 부족하나마 후학들에게 황정견 시를 이해하기 위한 초석을 다지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해제
황진시집주서
황정견시집주
산곡시집주
산곡시집주권제일(山谷詩集注卷第一)
1. 고시 2수. 자첨 소식에게 올리다(古詩 二首. 上蘇子瞻)
2. 순도가 대합을 얻고 다시 순천주(泉酒)를 찾으니, 순천주는 이미 다 떨어졌다. 관주(官酒)는 안주에 걸맞지 않으니 감히 보낼 수 없었다(醇道得蛤蜊, 復索舜泉, 舜泉已酌盡, 官醞不堪, 不敢送)
3. 왕치천이 객사에서 지은 시에 차운하다. 2수(次韻王穉川客舍. 二首)
4. 왕치천이 이미 수도 임안에서 벼슬을 얻었는데, 미인에게 빠져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내가 임부인을 대신하여 「애내곡」 2편을 지어 그에게 주었다【죽지가는 본래 파촉에서 나왔는데, 호상 지역까지 유행했다.】 애내는 호남 지방의 노래이다【애(欸)의 음(音)은 오(襖)이고, 내(乃)의 음(音)은 애(藹)이다】 王稚川旣得官都下, 有所盼未歸. 予戱作林夫人欸乃曲二章)與之. 【竹枝歌, 本出三巴, 其流在湖湘耳.】 欸乃, 湖南歌也. 【欸音襖, 乃音藹】
5. 역사를 읊어 서중거에게 주다【원주에서 “중거는 귀가 먹어서 벼슬을 그만두었다”라고 했다】(詠史呈徐仲車【元注曰, 仲車以聵棄官】)
6. 옛 팽택에 유숙하며 도연명을 회상하다(宿舊彭澤懷陶令)
7. 산곡의 석우동에 쓰다(題山谷石牛洞)
8. 첨봉각에 쓰다(題灊峰閣)
9. 외숙 이공택의 시에 차운하다(次韻公擇舅)
10. 공상에서 연밥을 먹는데 감회가 일어(贛上食蓮有感)
11. 가을날 생각이 일어 자유(子由) 소철(蘇轍)에게 보내다(秋思寄子由)
12. 이차옹에게 이별하며 주다( 贈別李次翁)
13. 연아체로 짓다(演雅)
14. 장난스레 새 울음에 화답하다(戲和答禽語)
15. 정교에게 주다(贈鄭交)
16. 평음 장등 거사의 은거지에서 3수(平陰張澄居士隠處 三首)
17. 왕랑 세필을 머무르게 하며(留王郞世弼)
18. 왕랑을 보내며(送王郞)
19. 유경문의 「등업왕대견사」에 차운하다. 5수(次韻劉景文登鄴王臺見思 五首)
20. 오선의의 「삼경회우」에 차운하다(次韻吳宣義三徑懷友)
21. 안문으로 종군하는 유계전을 전송하다. 2수 【안문은 지금의 대주이다】(送劉季展從軍鴈門. 二首【雁門今代州】)
22. 완릉 장대거의 곡굉정에 쓰다(題宛陵張待舉曲肱亭)
산곡시집주권제이(山谷詩集注卷第二)
1. 배중모에게 부치다(寄裴仲謨)
2. 황기복에게 부치다(寄黄幾復)
3. 신종황제 만사. 3수(神宗皇帝挽詞. 三首)
4. 왕문공 공의 만사. 2수(王文恭公挽詞. 二首)
5. 학원에서 딴 찻잎을 갈아 보낸 것에 사례하다(謝送碾壑源揀牙)
6. 소단룡과 반정을 무구에게 주면서 아울러 앞 시의 운자를 사용하여 시도 보내면서 희롱하다(以小團龍及半挺贈無咎并詩用前韻爲戱)
7. 장인 손신노에게 화답하다(和答外舅孫莘老)
8. 정국이 소자유가 적계에서 병으로 누웠다는 소식을 듣고 지은 시에 차운하다(次韻定國聞蘇子由臥病績溪)
9. 자유가 적계에서 병에서 일어나 부름을 받은 뒤 왕정국에게 보낸 시에 차운하다(次韻子由績溪病起被召寄王定國)
10. 이지순 소감이 벼루를 보내준 시에 차운하다(次韻李之純少監惠硯)
11. 선성으로 가는 외삼촌 야부를 전송하다. 2수(送舅氏野夫之宣城. 二首)
12. 경주 수령으로 가는 범덕유를 전송하다(送范徳孺知慶州)
13. 왕 황주의 묵적 뒤에 쓰다(題王黃州墨跡後)
14. 왕중궁 형제의 손정에 쓰다(題王仲弓兄弟巽亭)
15. 위 씨의 창관인 왕중궁에게 보내다(寄尉氏倉官王仲弓)
산곡시집주권제삼(山谷詩集注卷第三)
1. 강남의 휘장에 있는 향법을 보내주는 자가 있기에 희롱하여 6언시로 답하다. 2수(有惠江南帳中香者戲答六言. 二首)
2. 자첨이 이어서 화운하니 그에 다시 답하다. 2수(子瞻繼和復答. 二首)
3. 휘장 안의 향법으로 전갈을 볶는 것을 맡고서 앞 시의 운자를 써서 장난삼아 짓다. 2수(有聞帳中香以爲熬蝎者戲用前韻. 二首)
4. 공택 외숙이 차를 나눠 준 것에 감사하다. 3수(謝公擇舅分賜茶. 三首)
5. 벽향주를 정언능에게 보내면서 자첨의 운자를 써서 시를 지어 장난삼아 보내다(送碧香酒用子瞻韻戲贈鄭彦能)
6. 복창현의 수령으로 가는 정언능 선덕을 전송하다(送鄭彥能宣徳知福昌縣)
7. 현성사 정원의 구기자(顯聖寺庭枸杞)
8. 왕정국에게 준 자운의 시에 차운하다(次韻子瞻贈王定國)
9. 장순의 「재중만춘」이란 시에 차운하다(次韻張詢齋中晩春)
10. 조무구가 보내 준 시에 차운하여 답하다(次韻答晁無咎見贈)
11. 장문잠이 보내준 시에 차운하다(次韻答張文潛惠寄)
12. 전지중과 함께 적전의 전유문의 관사에서 식사하다(同錢志仲飯籍田錢孺文官舍)
13. 사인 증자개의 「유적전재화하귀」에 차운하다(次韻曾子開舍人遊籍田載荷花歸)
14. 복건의 전운판관으로 부임하는 유사언을 전송하다(送劉士彥赴福建轉運)
15. 봉사 한천의 「서태일궁」에 차운하다. 4수(次韻韓川奉祠西太一宮. 四首)
16. 왕형공이 서태일궁의 벽에 쓴 시에 차운하다. 2수(次韻王荊公題西太一宮壁. 二首)
17. 반산 노인을 그리며 다시 차운하다. 2수(有懷半山老人再次韻. 二首)
18. 전목부가 읊은 「성성모필」에 화답하다(和答錢穆父詠猩猩毛筆)
19. 장난삼아 성성모의 붓을 읊다. 2수(戱詠猩猩毛筆. 二首)
황정견
북송(北宋)을 대표하는 시인
박종훈 朴鍾勳, Park Chong-hoon
지곡서당(芝谷書堂)에서 한학(漢學)을 연수했으며, 조선대학교 국어국문학부(고전번역전공)에 재직 중이다.
박민정 朴玟貞, Park Min-jung
고려대학교에서 중국고전시 박사학위를, 중국저장대학(浙江大學)에서 대외한어교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세종사이버대학교 국제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관성 李灌成, Lee Kwan-sung
곡부서당에서 서암 김희진 선생에게 한문을 배웠다. 현재 퇴계학연구원에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