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황정견 | 역자/편자 | 박종훈, 박민정, 이관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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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 2024-08-15 | ||
ISBN | 979-11-5905-919-3 (94820) | ||
쪽수 | 500 | ||
판형 | 152*223 양장 | ||
가격 | 38,000원 |
송시다운 시가 시대, 그 중심에 있던 황정견
송나라는 개국(開國) 왕조인 태조부터 인종조(仁宗朝)를 거치면서 만당(晩唐)·오대(五代)의 장기간 혼란했던 국면이 정리되어 나라가 안정되었고, 백성들의 생활환경 또한 비교적 안정을 찾게 되었다. 전대(前代)의 가혹했던 정세가 완화됨에 따라 농업이 급속도로 발달하였고, 안정된 농업의 경제적 기초 위에서 상공업이 번창하고, 번화한 도시가 등장하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전대에 비해 상당한 풍요를 구가하게 되었다. 이처럼 사회 전체가 안정되고 발전함에 따라 일반 백성들은 단조로운 것보다 복잡하고 화려한 것을 추구하게 되었다. 시대적·사회적 환경은 곧 문학 출현의 배경이고, 문학은 사회생활이 반영된 예술이라고 할 만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유협(劉勰)이 “문학의 변천은 사회 정황에 따르다[文變染乎世情, 興廢繫乎時序]”고 한 것처럼, 사회의 각종 요인은 문학적 현상을 결정하기 때문에 이러한 요소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문학 풍조의 변혁을 동반한다. 송초 시체(詩體)의 변천은 이러한 사실을 보여주는 객관적인 증거이다. 특히 송대에는 일찍부터 학문이 중시되었다. 이는 주로 군주들의 독서열과 학문 제창으로 하나의 사회적 풍조로 자리 잡게 되어 송대의 중문중학(重文重學)적 분위기가 마련되었다.
황정견은 바로 이때 전성기를 구가하여 북송(北宋)을 대표하는 시인이다. 중국시가의 최고 전성기라 할 수 있는 당대(唐代)를 뒤이어 등장한 북송의 시인들에게는 당시에서 벗어난 송시만의 특징을 만들어 내야 하는 일종의 숙명이 있었다. 이러한 숙명은 북송 초 서곤체에 의해 시도되었으며 북송 중기에 이르러 비로소 송시다운 시가 시대를 풍미하기에 이르렀다. 황정견이 그 중심에 있었다.
후대까지 영향을 미친 황정견의 시론
황정견은 시를 지을 때 시의 표현을 다지고 시법을 엄격히 지켜 한 마디 한 글자도 가벼이 쓰지 않았다. 황정견은 수많은 대가들을 본받으려고 했지만, 그중에서도 두보(杜甫)를 가장 존중했다. 황정견은 두보 시의 예술적인 성취나 사회시(社會詩) 같은 내용 측면에서의 계승보다는, 엄정한 시율과 교묘(巧妙)한 표현 등 시의 형식적 측면을 본받으려 했다. 황정견 시론의 요점을 정리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시의 조구법(造句法)으로서의 환골법(換骨法)과 탈태법(奪胎法)이다. 이에 대해 황정견은 “시의 의미는 무궁한데 사람의 재주는 한계가 있다. 한계가 있는 재주로 무궁한 의미를 좇으려고 하니, 비록 도잠과 두보라고 하더라도 공교롭기 어렵다. 원시의 의미를 바꾸지 않고 그 시어를 짓는 것을 환골법이라고 하고, 원시의 의미를 본떠서 형용하는 것을 탈태법이라고 한다[詩意無窮, 而人才有限. 以有限之才, 追無窮之意, 雖淵明少陵, 不得工也. 不易其意而造其語, 謂之換骨法. 規摹其意而形容之, 謂之奪胎法]”(『시인옥설(詩人玉屑)』)라고 한 바 있다. 이로 보건대, 황정견이 언급한 환골법은 의경을 유사하게 하면서 어휘만 조금 바꾼 것을 일컫고, 탈태법은 의경을 변형하여 사용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진부한 표현이나 속된 말을 배척하고 특이한 말과 기이한 표현을 추구했다. 구체적으로는 술어를 중심으로 평이한 글자를 기이하게 단련(鍛鍊)시켰고 조자(助字)의 사용에 힘을 특히 기울였으며, 매우 궁벽하고 어려운 글자를 사용했고 기이한 풍격을 형성하기 위해 전대(前代) 시에서 잘 쓰지 않던 비속(非俗)한 표현을 시어로 구사하여 참신한 의경을 만들어내곤 했다.
셋째, 전고(典故)의 정밀한 사용을 추구했다. 이는 황정견 시론의 “한 글자도 유래가 없는 것은 없다[無一字無來處]”와 연관된다. 강서시파는 독서를 중시했는데, 이것은 구법의 차원에서 전대 시의 장점을 수용하기 위한 것이지만, 이는 전고의 교묘(巧妙)한 활용이라는 결과로 표현되기도 했다. 그러면서 전인의 전고를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자신의 의도에 맞게 변용했다.
이와 같은 황정견의 창작법에 대해 부정적 평가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 평가는 황정견 시의 파급력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황정견을 중심으로 한 강서시파가 당대(當代)는 물론 후대 및 조선의 문인들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황정견의 시를 세밀히 소개하다
황정견은 현존하는 가장 공신력 있는 중화서국(中華書局)본에 따르면 총 1,916수의 시 작품을 남겼다. 북경(北京) 중화서국(中華書局)에서 2007년에 출간한 전 5책의 『황정견시집주』에는 총 1,260제(題) 1,916수(首)의 시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황정견 작품의 구절 및 시어(詩語) 하나하나가 갖는 전례와 창작배경 그리고 구절의 의미 및 전체적인 의미를 상세하게 주석을 통해 소개해, 황정견 작품의 세밀한 이해를 돕고 있다. 이 책에서는 『황정견시집주』에 소개된 모든 주석을 꼼꼼하게 번역하였으며, 주석의 내용을 시의 자구(字句) 해석에 최대한 반영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황정견 시가 워낙 난해하여, 경우에 따라서는 주석이 시 본문과 어떤 연계성이 있는지조차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이러한 경우에도 연결 관계를 최대한 찾아 시 본문 번역에 녹여내고자 노력하였다.
황정견에 대한 연구는 지금까지 꾸준히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아직까지 황정견 시 작품에 대한 전체적인 번역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구체적인 실상의 일면만을 위주로 하거나 혹은 피상적으로 연구가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이에 상세한 주석을 통해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돕는 『황정견시집주』에 대한 완역은, 부족하나마 후학들에게 황정견 시를 이해하기 위한 초석을 다지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해제
황진시집주서
황정견시집주
산곡시집주
산곡시집주권제십육(山谷詩集注卷第十六)
1. 고자면에게 차운하다. 10수(次韻高子勉. 十首)
2. 고자면에게 보내다. 4수(贈高子勉. 四首)
3. 다시 앞의 운자를 써서 자면에게 보내다. 4수(再用前韻贈子勉. 四首)
4. 형남의 첨판 향화경이 내가 지은 육언시의 운자를 이용해 시를 지어 보내주었기에 다시 차운하여 삼가 드리다. 4수(荊南簽判向和卿用予六言見惠, 次韻奉酬. 四首)
5. 의접도(蟻蝶圖)
6. 호장지가 율렵미로 그린 유마를 보내왔기에 사례하다. 2수(謝胡藏之送栗巤尾畫維摩. 二首)
7. 향화경이 송자현에 갔다가 추천석과 밤에 남극정에 대해 말한 작품에 차운하다. 2수(次韻向和卿行松滋縣, 與鄒天錫夜語南極亭. 二首)
8. 형주 왕충도가 끓인 차를 보내왔기에 장난스레 답하다. 4수【구본에서 “거사는 술꾼이라서 차 마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장난스레 지은 구절이 많다”라고 했다】(戲答荊州王充道烹茶. 四首【舊本云, 居士酒徒, 不喜茗飮, 故多戲句】)
9. 빗속에 악양루에 올라 군산을 바라보다. 2수(雨中登岳陽樓望君山. 二首)
10. 파릉 약평강으로부터 상강에 다달아 통성으로 들어갔는데 하루도 비가 내리지 않은 날이 없었다. 황룡에 이르러 삼가 청선사를 배알했고 이어 저물녘 날이 개이자 선객 대도순을 만나 정겹게 말을 나누었다. 장구의 작품을 지어 도순에게 드리다(自巴陵略平江臨湘入通城, 無日不雨. 至黃龍, 奉謁淸禪師, 繼而晩晴, 邂逅禪客戴道純欵語, 作長句呈道純)
11. 서 씨의 서원에 쓰다(題徐氏書院)
12. 석민약에게 보내다【석무의 자는 민약이다】(贈石敏若【石懋字敏若】)
13. 호일로의 치허암에 쓰다(題胡逸老致虛庵)
14. 연화사에 쓰다(題蓮華寺)
15. 비를 맞고 만재로 가는 도중에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마침내 장난스레 쓰다(衝雨向萬載道中, 得逍遙觀, 遂戲題)
16. 죽존자의 집에 쓰다(題竹尊者軒)
17. 밀로가 오봉에 거주하려 가기에 헤어지다【밀로는 대개 법창의 후손이다】(送密老住五峯【密老蓋法昌之嗣】)
18. 신유 가는 길에 원명에게 ‘상’자의 운자로 시를 써서 보내다(新喻道中, 寄元明用觴字韻)
산곡시집주권제십칠(山谷詩集注卷第十七)
1. 유응지의 화상을 배알하다(拜劉凝之畫像)
2. 호구 사람 이정신이 기이한 돌로 아홉 봉우리를 만들었는데, 동파 소식 선생이 ‘호중구화’라고 이름 붙이고 더불어 이를 위해 시를 썼다. 8년이 지난 뒤에 해외로부터 돌아와 호구를 지났는데, 그 돌은 이미 호사가들이 가져갔기에 이전에 지은 작품에 화운하면서 웃어넘기었다. 그때가 건중정국 원년 4월 16일이었다. 다음 해인 숭녕 원년 5월 20일, 황정견이 호구에 배를 대자, 이정신이 이 시를 가지고 찾아왔다. 돌은 이미 다시 볼 수가 없었고 동파 소식도 또한 세상을 떠났었다. 이에 감동하고 탄식함을 마지못하여 앞 작품에 차운한다(湖口人李正臣蓄異石九峯, 東坡先生名曰壺中九華, 幷爲作詩. 後八年, 自海外歸, 湖口, 石 已爲好事者所取, 乃和前篇, 以爲笑. 實建中靖國元年四月十六日. 明年當崇寧之元五月二十日, 庭堅繫舟湖口, 李正臣持此詩來. 石旣不可復見, 東玻亦下世矣. 感歎不足, 因次前韻)
3. 고숙성을 떠나면서 원명元明에게 ‘상’자 운을 써서 보내다【『통전』에서 “당도현은 곧 진 땅 고숙성이다”라고 했다. 살펴보건대, 당도는 지금 태평주가 되었다】(罷姑熟, 寄元明用觴字韻【通典曰, 當塗縣卽晉姑熟城. 按當塗今爲太平州】)
4. 자첨 소식이 태백 이백의 「심양자극궁감추」라는 시의 운자에 화운한 작품에 차운하여, 이백과 소식을 회억하다(次蘇子瞻和李太白潯陽紫極宮感秋詩韻, 追懷太白子瞻)
5. 경지헌(瓊芝軒)
6. 귀각헌(龜殻軒)
7. 추성헌(秋聲軒)
8. 설월이 지은 원공을 읊조린 작품을 장난스레 흉내 내다【서문을 덧붙이다】(戱效禪月作遠公詠【幷序】)
9. 자첨 소식이 도잠의 시에 화운한 것에 발문을 달다【동파 소식이 연명 도잠의 시에 화운한 것은 109수이다. 옛사람의 작품을 회억하며 화운한 것은 동파 소식에게서 시작되었다】(跋子瞻和陶詩【東坡和陶淵明詩, 凡一百有九篇. 追和古人, 自東坡始】)
10. 이량공의 『대숭우도』에 쓰다(題李亮功戴嵩牛圖)
11. 동파 소식이 이량공의 『귀래도』에 쓴 작품에 뒤미쳐 화운하다(追和東坡題李亮功歸來圖)
12. 서중거가 동원달의 방문을 기뻐하며 지은 남곽편 사운에 차운하다【서적의 자는 중거로 위의 주에 보인다. 원달의 이름은 규이다】(次韻徐仲車喜董元達訪之作南郭篇四韻【徐積字仲車, 見上注. 元達名逵】)
13. 중거가 원달을 위해 술을 마련하면서 지은 사운에 차운하다(次韻仲車爲元達置酒四韻)
14. 중거가 누행보가 보내온 작품에 차운한 작품에 차운하다 (次韻仲車因婁行父見寄之詩)
15. 무창의 송풍각【무창은 지금의 악주현이다】(武昌松風閣【武昌, 今鄂州縣】)
16. 문잠의 작품에 차운하다(次韻文潛)
17. 문잠이 배 가운데서 지은 작품에 화운하다(和文潛舟中所題)
18. 군자천에 쓰다(題君子泉)
19. 황주 관음원 종루 위에서 자다(宿黃州觀音院鐘樓上)
20. 하십삼이 게를 보내왔기에 사례하다【산곡이 협주를 나온 후에 병 때문에 자못 고기와 술을 삼가 했었다】(謝何十三送蟹【山谷出峽後, 以病故, 頗開葷酒之戒】)
21. 또한 「답송해」의 운자를 빌려서 더불어 소하를 희롱하다【세 수는 모두 『수수집』에 보이는데, 지금 이곳에 덧붙인다】(又借答送蟹韻, 幷戱小何【三首皆見修水集, 今附于此】)
22. 두 집게발을 대신하여 조롱을 해명하다(代二螯解嘲)
23. 또한 앞 작품의 운자를 빌려 마음을 드러내다(又借前韻見意)
24. 문잠의 「입춘일삼절구」에 차운하다(次韻文潛立春日三絶句)
25. 재차 앞 작품의 운자에 차운하다(再次前韻)
산곡시집주권제십팔(山谷詩集注卷第十八)
1. 꿈속에서 ‘상’자 운에 화운하다【서문을 덧붙이다】(夢中和觴字韻【幷序】)
2. 오가권이 여간현 백운정에 쓴 작품에 차운하다【여간은 지금의 예요주이다】(次韻吳可權題餘干縣白雲亭【餘干今隸饒州】)
3. 요명략이 오명부와 백운정에 모여 잔치하며 지은 작품에 차운하다(次韻廖明略同吳明府白雲亭宴集)
4. 병들어 열흘 동안 술을 마시지 못했다. 2수(病來十日不擧酒. 二首)
5. 소경의 부채에 쓰다(題小景扇)
6. 악주 남루에서 쓰다. 4수(鄂州南樓書事. 四首)
7. 남루 화각에서 방공열의 두 편의 짧은 시를 보고 장난스레 차운하다(南樓畵閣觀方公悅二小詩戱次韻)
8. 내가 지난 해 9월 악주에 이르러 남루에 올라갔다가 지어 놓은 것이 아름다워 탄복했다. 이에 장구를 지어 오래도록 멀리까지 전하고자 했다. 지금에서야 장구를 써서 공열에게 드린다(庭堅以去歲九月至鄂, 登南樓, 歎其制作之美, 成長句, 久欲寄遠, 因循至今, 書呈公悅)
9. 싸움닭을 키우다(養鬪雞)
10. 안도의 빈락재. 2수【안도의 성은 황이고 이름은 우안으로 시어사 황조의 셋째 아들이다. 산곡 황정견이 수첩을 쓰면서 종맹의 우호를 서술했었다】(顔徒貧樂齋. 二首【顔徒姓黃, 名友顔, 侍御史照之第三子. 山谷有手帖, 敘宗盟之好】)
11. 화량헌. 2수(和涼軒. 二首)
12. 묵헌 화준 노인에 대해 쓰다(題黙軒和遵老)
13. 문안국의 「기몽」이란 작품에 차운하다【자유 소철의 『난성후집』 권1에도 또한 이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데, 다만 작품의 제목을 고쳐 「증요도인」이라고 했다. 마땅히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次韻文安國紀夢【蘇子由欒城後集第一卷亦載此詩, 更其題云贈姚道人, 當細考之】)
14. 하방회에게 부치다(寄賀方回)
15. 문안국에 대한 만사. 2수【문훈의 자는 안국이다】(文安國挽詞. 二首【文勛字安國】)
16. 악주의 절도추관 진영서가 은혜롭게 「수양도중」이라는 6편의 작품을 격문에 딸려 보내왔는데, 내가 늙고 게을러 곧바로 차운하지 못하다가 문득 절로 그 운자를 취하여 화답하여 드리다(鄂州節推陳榮緒惠示㳂檄崇陽道中六詩, 老懶不能追韻, 輒自取韻奉和)
17. 진영서가 ‘지’자 운으로 지은 시를 은혜롭게 보여주면서 이에 화답하기를 요청했으나 나의 실력이 이에 미치지 못해 감당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문득 멋진 운자에 차운한다. 3수(陳榮緒惠示之字韻詩推獎, 過實非所敢當, 輒次高韻. 三首)
산곡시집주권제십구(山谷詩集注卷第十九)
1. 덕유 오장이 ‘지’자에 화운하였는데, 시의 운자가 어려울수록 더욱 공교로웠다. 이에 다시 화운하여 작품을 지으니 한 번 웃을 만하다【범덕유에 대해서는 위의 주에 보인다】(德孺五丈和之字, 詩韻難而愈工, 輒復和成, 可發一笑【范德孺見上注】)
2. 덕유의 「신거병기」라는 작품에 차운하다(次韻德孺新居病起)
3. 덕유의 「감흥」이란 작품에 차운하다. 2수(次韻德孺感興. 二首)
4. 덕유가 은혜롭게 보내준 ‘추’자 운의 구절에 차운하다(次韻德孺惠貺秋字之句)
5. 범자묵에게 물들인 아청지를 구하다. 2수(求范子黙染鴉靑紙. 二首)
6. 영서가 은혜롭게 선즉을 보내주었기에 사례하다(謝榮緒惠貺鮮鯽)
7. 영서가 노루 고기를 잘라 보내주었기에 사례하다. 2수(謝榮緒割麞見貽. 二首)
8. 오집중에게 두 마리 거위가 있었는데, 나를 위해 삶아 주었다. 이에 장난스레 써서 보내주다(吳執中有兩鵝, 爲余烹之, 戱贈)
9. 가을과 겨울 사이 악주 물가의 시장에서 게가 사라졌다. 그러나 오늘 우연히 몇 마리 보았는데 거품을 토하면서 서로를 적셔주고 있었는데 불쌍했다. 이에 웃으며 장난스레 칠언 절구를 짓는다. 3수(秋冬之間, 鄂渚絶市無蟹, 今日偶得數枚, 吐沫相濡, 乃可憫. 笑戱成小詩. 三首)
10. 영자여가 내가 지은 「악양루」라는 작품에 뒤미쳐 화운하였기에, 다시 그 운자에 차운하다. 2수(甯子與追和予岳陽樓詩, 復次韻. 二首)
11. 영자여의 「백록사」라는 작품에 화운하다【백록사는 담주에 있다】(和甯子與白鹿寺【寺在潭州】)
12. 어떤 이가 은혜롭게 묘두순을 보내왔기에 사례하다(謝人惠貓頭笋)
13. 짧은 시로 납매를 삼가 구하다(短韻奉乞臘梅)
14. 두보의 ‘줄갈애강청’이란 구절로 다섯 수를 지를 요명략 학사에게 보내고 더불어 초화보 주부에게 편지로 보내다【두보의 「군주우치가기심팔유수」에서 “술 마셔 갈증 나면 강물 맑음 사랑했고, 실컷 취하면 저물녘 강물로 이 닦았네”라고 했다】(以酒渴愛江淸作五小詩, 寄廖明略學土兼簡初和父主簿【老杜詩, 酒渴愛江淸, 餘酣潄晩汀】)
15. 사휴거사시【서문을 덧붙이다】(四休居士詩【幷序】)
16. 12월 19일 밤에 악저를 출발하여 새벽에 한양에 도착했다. 벗들이 술을 가지고 송별해 준 것에 뒤미쳐 애오라지 단구를 지었다(十二月十九日, 夜中發鄂渚, 曉泊漢陽, 親舊携酒追送, 聊爲短句)
17. 진영서와 함께 종루에 기대 석양을 바라보았는데, 헤어진 다음날 보내온 작품에 차운하다(次韻陳榮緒同倚鐘樓晩望, 別後明日, 見寄之作)
18. 동정 청초호를 지나다(過洞庭靑草湖)
19. 토산채를 지나다(過土山寨)
20. 저물녘 장사에 이르러, 처도 진담과 원실 범온에게 명략과 화보에게 보내준 작품의 운자에 차운하여 보여주다. 5수(晩泊長沙, 示秦處度【湛】范元實【溫】用寄明略和父韻. 五首)
21. 원실이 지은 「병목」이란 작품에 차운하다(韻元實病目)
22. 승업사의 열정에서(勝業寺悅亭)
23. 복암을 떠나면서(離福嚴)
24. 화광중인이 진관과 소식의 시권을 꺼냈는데, 두 국사를 다시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책을 열면서 탄식했다. 인하여 하광이 나를 위해 매화 두세 가지를 만들고 안개 밖에 있는 먼 산을 그림으로 그렸다. 이에 뒤미쳐 소유 진관의 운자에 차운하여 시권 끝에 기록한다【중인은 형주 화광산의 장로인데, 산곡 황정견이 그를 위해 「천보송명」을 지은 바 있다】(花光仲仁出秦蘇詩卷, 思兩國士不可復見, 開卷絶歎, 因花光爲我作梅數枝及畫煙外遠 山, 追少游韻, 記卷末【仲仁蓋衡州花光山長老, 山谷爲作天保松銘云】)
25. 화광의 그림에 쓰다(題花光畫)
26. 화광이 그린 산수에 쓰다(題花光畫山水)
27. 소주당(所住堂)
28. 고절정 옆 산반화를 장난스레 읊조리다. 2수【서문을 덧붙이다】(戱詠高節亭邊山礬花. 二首【幷序】)
산곡시집주권제이십(山谷詩集注卷第二十)
1. 혜홍에게 주다【혜홍의 자는 각범으로 균주 팽씨의 아들인데,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贈惠洪【惠洪字覺範, 筠州彭氏子, 祝髮爲僧】)
2. 영릉 이종고 거사의 집에서 자고새를 기르고 있기에 장난스레 읊조리다. 2수【원주에서 “이종고는 한 명의 처와 한 명의 딸아이와 살고 있었는데, 늘그막에 다리에 병이 생겨 자고새와 앵무새를 기르면서 남은 생애를 즐기고 있었다”라고 했다. 〇 ‘영릉’은 지금의 호남 영주이다】(戱詠零陵李宗古居士家馴鷓鴣. 二首【元注云, 李唯一妻一女, 病足, 養鷓鴣鸚鵡以樂餘年.〇 零陵, 今湖南永州】)
3. 이종고가 사도인과 이도인 두 사람의 초추장을 꺼내어 보여주었고 따라왔던 장언회가 장지 두 곳을 부탁했었다. 이에 칭송하는 두 편의 시를 지어 삼가 드린다(李宗古出示謝李道人苕菷杖, 從蔣彥回乞葬地二, 頌作二詩, 奉呈)
4. 마애비 뒤에 쓰다(書磨崖碑後)
5. 오계도(浯溪圖)
6. 태평사의 자씨각【원주에서 “저물녘에 증곤 공과 함께 올랐다”라고 했다】(太平寺慈氏閣【元注云, 晩與曾公袞同登】)
7. 담산암에 쓰다. 2수(題淡山巖. 二首)
8. 명원암(明遠庵)
9. 옥지원【서문을 덧붙이다】(玉芝園【幷序】)
10. 우계에서 노닐다【서문을 덧붙이다】(遊愚溪【幷序】)
11. 취암의 신선사에게 대신 써서 보내다(代書寄翠巖新禪師)
12. 구양성발이 봉의에서 내가 보내준 「다가」에 사례한 작품에 장난스레 답하다(戱答歐陽誠發奉議謝余送茶歌)
13. 계주에 이르다(到桂州)
14. 허각지가 은혜롭게 계화와 야자로 만든 찻그릇을 보내주었기에 답하다. 2수【허각지의 이름은 언선이다】(答許覺之惠桂花椰子茶盂. 二首【彦先】)
15. 야자나무로 만든 차 단지를 덕유에게 보내다. 2수(以椰子茶瓶寄德孺. 二首)
16. 황룡산의 청로에게 부치다. 3수(寄黃龍淸老. 三首)
17. 의양에서 원명과 헤어지며 ‘상’자의 운으로 짓다(宜陽別元明, 用觴字韻)
18. 범신중의 「우거숭녕우우」라는 작품에 화운하다. 2수(和范信中寓居崇寧遇雨. 二首)
19. 종유를 증공곤에게 구하다(乞鍾乳于曾公袞)
저자
황정견/ 북송(北宋)을 대표하는 시인
역자
박종훈 朴鍾勳, Park Chong-hoon
지곡서당(芝谷書堂)에서 한학(漢學)을 연수했으며, 조선대학교 국어국문학부(고전번역전공)에 재직 중이다.
박민정 朴玟貞, Park Min-jung
고려대학교에서 중국고전시 박사학위를, 중국저장대학(浙江大學)에서 대외한어교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세종사이버대학교 국제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관성 李灌成, Lee Kwan-sung
곡부서당에서 서암 김희진 선생에게 한문을 배웠다. 현재 퇴계학연구원에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