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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견시집주 10
저자 황정견 역자/편자 박종훈, 박민정, 이관성
발행일 2024-08-15
ISBN 979-11-5905-924-7 (94820)
쪽수 357
판형 152*223 양장
가격 2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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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다운 시가 시대, 그 중심에 있던 황정견

송나라는 개국(開國) 왕조인 태조부터 인종조(仁宗朝)를 거치면서 만당(晩唐)·오대(五代)의 장기간 혼란했던 국면이 정리되어 나라가 안정되었고, 백성들의 생활환경 또한 비교적 안정을 찾게 되었다. 전대(前代)의 가혹했던 정세가 완화됨에 따라 농업이 급속도로 발달하였고, 안정된 농업의 경제적 기초 위에서 상공업이 번창하고, 번화한 도시가 등장하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전대에 비해 상당한 풍요를 구가하게 되었다. 이처럼 사회 전체가 안정되고 발전함에 따라 일반 백성들은 단조로운 것보다 복잡하고 화려한 것을 추구하게 되었다. 시대적·사회적 환경은 곧 문학 출현의 배경이고, 문학은 사회생활이 반영된 예술이라고 할 만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유협(劉勰)이 “문학의 변천은 사회 정황에 따르다[文變染乎世情, 興廢繫乎時序]”고 한 것처럼, 사회의 각종 요인은 문학적 현상을 결정하기 때문에 이러한 요소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문학 풍조의 변혁을 동반한다. 송초 시체(詩體)의 변천은 이러한 사실을 보여주는 객관적인 증거이다. 특히 송대에는 일찍부터 학문이 중시되었다. 이는 주로 군주들의 독서열과 학문 제창으로 하나의 사회적 풍조로 자리 잡게 되어 송대의 중문중학(重文重學)적 분위기가 마련되었다. 

황정견은 바로 이때 전성기를 구가하여 북송(北宋)을 대표하는 시인이다. 중국시가의 최고 전성기라 할 수 있는 당대(唐代)를 뒤이어 등장한 북송의 시인들에게는 당시에서 벗어난 송시만의 특징을 만들어 내야 하는 일종의 숙명이 있었다. 이러한 숙명은 북송 초 서곤체에 의해 시도되었으며 북송 중기에 이르러 비로소 송시다운 시가 시대를 풍미하기에 이르렀다. 황정견이 그 중심에 있었다. 

 

후대까지 영향을 미친 황정견의 시론

황정견은 시를 지을 때 시의 표현을 다지고 시법을 엄격히 지켜 한 마디 한 글자도 가벼이 쓰지 않았다. 황정견은 수많은 대가들을 본받으려고 했지만, 그중에서도 두보(杜甫)를 가장 존중했다. 황정견은 두보 시의 예술적인 성취나 사회시(社會詩) 같은 내용 측면에서의 계승보다는, 엄정한 시율과 교묘(巧妙)한 표현 등 시의 형식적 측면을 본받으려 했다. 황정견 시론의 요점을 정리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시의 조구법(造句法)으로서의 환골법(換骨法)과 탈태법(奪胎法)이다. 이에 대해 황정견은 “시의 의미는 무궁한데 사람의 재주는 한계가 있다. 한계가 있는 재주로 무궁한 의미를 좇으려고 하니, 비록 도잠과 두보라고 하더라도 공교롭기 어렵다. 원시의 의미를 바꾸지 않고 그 시어를 짓는 것을 환골법이라고 하고, 원시의 의미를 본떠서 형용하는 것을 탈태법이라고 한다[詩意無窮, 而人才有限. 以有限之才, 追無窮之意, 雖淵明少陵, 不得工也. 不易其意而造其語, 謂之換骨法. 規摹其意而形容之, 謂之奪胎法]”(『시인옥설(詩人玉屑)』)라고 한 바 있다. 이로 보건대, 황정견이 언급한 환골법은 의경을 유사하게 하면서 어휘만 조금 바꾼 것을 일컫고, 탈태법은 의경을 변형하여 사용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진부한 표현이나 속된 말을 배척하고 특이한 말과 기이한 표현을 추구했다. 구체적으로는 술어를 중심으로 평이한 글자를 기이하게 단련(鍛鍊)시켰고 조자(助字)의 사용에 힘을 특히 기울였으며, 매우 궁벽하고 어려운 글자를 사용했고 기이한 풍격을 형성하기 위해 전대(前代) 시에서 잘 쓰지 않던 비속(非俗)한 표현을 시어로 구사하여 참신한 의경을 만들어내곤 했다. 

셋째, 전고(典故)의 정밀한 사용을 추구했다. 이는 황정견 시론의 “한 글자도 유래가 없는 것은 없다[無一字無來處]”와 연관된다. 강서시파는 독서를 중시했는데, 이것은 구법의 차원에서 전대 시의 장점을 수용하기 위한 것이지만, 이는 전고의 교묘(巧妙)한 활용이라는 결과로 표현되기도 했다. 그러면서 전인의 전고를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자신의 의도에 맞게 변용했다.

이와 같은 황정견의 창작법에 대해 부정적 평가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 평가는 황정견 시의 파급력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황정견을 중심으로 한 강서시파가 당대(當代)는 물론 후대 및 조선의 문인들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황정견의 시를 세밀히 소개하다

황정견은 현존하는 가장 공신력 있는 중화서국(中華書局)본에 따르면 총 1,916수의 시 작품을 남겼다. 북경(北京) 중화서국(中華書局)에서 2007년에 출간한 전 5책의 『황정견시집주』에는 총 1,260제(題) 1,916수(首)의 시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황정견 작품의 구절 및 시어(詩語) 하나하나가 갖는 전례와 창작배경 그리고 구절의 의미 및 전체적인 의미를 상세하게 주석을 통해 소개해, 황정견 작품의 세밀한 이해를 돕고 있다. 이 책에서는 『황정견시집주』에 소개된 모든 주석을 꼼꼼하게 번역하였으며, 주석의 내용을 시의 자구(字句) 해석에 최대한 반영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황정견 시가 워낙 난해하여, 경우에 따라서는 주석이 시 본문과 어떤 연계성이 있는지조차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이러한 경우에도 연결 관계를 최대한 찾아 시 본문 번역에 녹여내고자 노력하였다.

황정견에 대한 연구는 지금까지 꾸준히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아직까지 황정견 시 작품에 대한 전체적인 번역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구체적인 실상의 일면만을 위주로 하거나 혹은 피상적으로 연구가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이에 상세한 주석을 통해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돕는 『황정견시집주』에 대한 완역은, 부족하나마 후학들에게 황정견 시를 이해하기 위한 초석을 다지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해제

황진시집주서

 

황정견시집주

산곡외시집주

산곡외집시주권제십삼(山谷外集詩注卷第十三)

1. 사문호가 원풍 연간에 문고를 올리다(謝文灝元豐上文藁)

2. 『방언』을 읽고서(讀方言)

3. 「추교만등」에 차운하다(次韻秋郊晚望)

4. 주덕부의 「경행불상견」에 차운하다(次韻周德夫經行不相見之詩)

5. 구양종도가 금귤을 보내주기로 하였기에 시로 독촉하였다 (歐陽從道許寄金橘以詩督之)

6. 길노의 짧은 시 열 편에 차운하다(次韻吉老十小詩)

7. 길노의 「기군용」에 차운하다(次韻吉老寄君庸)

8. 만안산에 있는 밭을 길노 현승이 감독한다는 것을 듣고(聞吉老縣丞按田在萬安山中)

9. 길노가 집에 돌아와서 지은 절구 두 수에 차운하여 기쁨을 노래하다(次韻喜陳吉老還家二絶)

10. 다시 차운하여 길노에게 답하다. 2수(再次韻答吉老. 二首)

11. 태화에서 길노 현승에게 삼가 올리다(太和奉呈吉老縣丞)

12. 지명의 「영화도중」에 차운하다(次韻知命永和道中知命名叔達)

13. 길노와 지명이 함께 청원에 유람하며 지은 시에 차운하다. 2수(次韻吉老知命同遊靑原. 二首)

14. 지명이 청원산 입구에 들어가며 지은 시에 차운하다(次韻知命入靑原山口)

15. 길노가 청원산에서 노닐다가 돌아가려고 하면서 지은 시에 차운하다(次韻吉老遊靑原將歸)

16. 아우 지명이 청원에서 돌아온 것을 기뻐하다(喜知命弟自靑原歸)

17. 장의보에게 주다(寄張宜父)

18. 주부 언부를 보내다(送彦孚主簿)

19. 여간 서은보에게 부치다(寄餘干徐隱甫)

20. 이화보가 대신 편지 삼아 보낸 두 절구에 받들어 화답하다(奉答李和甫代簡二絶句)

21. 왕환중에게 주다(贈王環中)

22. 우사승이 왕순노에게 쌀을 빌린 시에 장난삼아 화운하다(戲和于寺丞乞王醇老米)

23. 영신의 종령이 석이를 보내준 것에 답하다(答永新宗令寄石耳)

24. 주방의 이도인에게 주다(贈朱方李道人)

25. 『전정록』에 써서 이백유에게 주다. 2수(題前定錄贈李伯牖. 二首)

26. 정거사 상방에서 남쪽으로 오솔길 따라가면 낚시터가 나온다. 그 경치가 매우 예스러운데 세속에서 무망의라고 부른다. 일찍이 은군자가 그 위에서 낚시하였다고 하니 감개가 일어 시를 지었다(靜居寺上方南入一徑 有釣臺 氣象甚古 而俗傳謬妄意 嘗有隱君子漁釣其上 感之作詩)

27. 고지가 말하기를 “집의 채마밭에 정자를 지어 어버이를 섬기는데, 사방의 풍경이 풍부한 것을 모두어 계정이라 명명하였다”라 하고는 나에게 시를 지어 달라 부탁하였다. 우리 선군의 허름한 집이 고자가 지은 정자와 불과 소가 열 번 울 거리에 있다. 그러므로 내가 올라가 보지 않아도 그곳이 경치 좋은 곳임을 안다(高至言築亭於家圃以奉親總其觀覧之富 命曰溪亭乞余賦詩 余先君之敝廬 望高子所築不過十牛 鳴地耳 故余未嘗登之而得其勝處)

28. 식헌에 쓰다(題息軒)

29. 신이인수탑에 쓰다(題神移仁壽塔)

30. 해수좌의 벽에 쓰다(題海首座壁)

31. 인상좌의 소나무 그림에 쓰다(題仁上座畫松)

32. 왕마힐의 그림(摩詰畫)

33. 내가 서강에 배를 대던 일을 추억하며 차운하다(追憶予泊舟西江事次韻)

34. 궁호정(宮亭湖)

35. 원풍 계해년에 가는 길에 석담사를 들러 옛날에 화운했던 서섬의 시를 보니 대단히 형편없었다. 인하여 그 목판을 없애 원고를 없애고 다시 한 편을 화운하였다(豊癸亥經行石潭寺 舊和栖蟾詩 甚可笑 因削柎滅藁別和一)

 

산곡외집시주권제십사(山谷外集詩注卷第十四)

1. 밤에 분녕을 떠나면서 두간 어른에게 보내다(夜發分寧寄杜澗叟)

2. 두반간 어른의 명홍정에 쓰다(題杜槃澗叟㝠鴻亭)

3. 집을 지나다(過家)

4. 성묘(上冢)

5. 고을을 다스리는 명숙이 「과가(過家)」와 「성묘하다([上冢])」 두 편에 화운하였기에 다시 차운하다(明叔知縣和示過家上冢二篇復次韻)

6. 곽명숙의 「장가」에 차운하다(次韻郭明叔長歌)

7. 청수암을 읊어서 곽명숙에게 올리다【서문을 함께 싣다】(詠淸水巖呈郭明叔【幷序】)

8. 「청수암」에 차운하다(次韻淸水巖)

9. 장화보 낚시터 정자에 쓰다【나오는 대로 쓰다】(題章和甫釣亭【放言】)

10. 동관현에서 오송산을 바라보며【집구시】(銅官縣望五松山【集句】)

11. 함평에서 태강에 가면서 말안장에서 짧은 시 열 편을 지어 안숙원에게 소회를 보내고 아울려 여행길에 있는 왕치천에게 안부 삼아 보냈는데, 왕치천이 “노란 거위 새끼 술 같으니, 술 마주하며 새 아황주를 사랑하네”라는 시구로 다른 날 취할 때 안숙원과 운자로 삼아 읊었다. 인하여 이것으로 운자를 삼다(自咸平至太康 鞍馬間得十小詩 寄懷晏叔原 幷問王稚川行李 鵝兒黄似酒對酒愛新鵝 此他日醉 時 與叔原所詠 因以爲韻)

12. 집에 부치다(寄家)

13. 초화보의 시에 차운하여 고풍으로 지어 답하다. 2수(古風次韻答初和甫. 二首)

14. 화보의 「노천수」에 차운하여 답하다. 3수(次韻答和甫盧泉水. 三首)

15. 화보가 대나무 뿌리 두어 본을 주한에게서 얻고서 기뻐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화운하다(和甫得竹數本於周翰喜而作詩和之)

16. 경기보 수령에게 부치다. 신당읍을 지나면서 지었으니, 바로 기보가 옛날 다스리던 곳이다(寄耿令幾父 過新堂邑作 迺幾父舊治之地)

17. 거침없이 말하다. 10수(放言. 十首)

18. 서울로 들어가는 큰 형님을 전송하다(送伯氏入都)

19. 황하를 건너다(渡河)

20. 태화 승으로 부임하는 여지상을 전송하다(送呂知常赴太和丞)

21. 장영숙과 이별하다(別蔣頴叔)

22. 평원에서의 잔치. 2수(平原宴坐. 二首)

23. 유경문과 함께 곽 씨의 서원에 노닐다가 인하여 유숙하였다(同劉景文遊郭氏西園因留宿)


저자

황정견/ 북송(北宋)을 대표하는 시인


역자

박종훈 朴鍾勳, Park Chong-hoon

지곡서당(芝谷書堂)에서 한학(漢學)을 연수했으며, 조선대학교 국어국문학부(고전번역전공)에 재직 중이다.

박민정 朴玟貞, Park Min-jung

고려대학교에서 중국고전시 박사학위를, 중국저장대학(浙江大學)에서 대외한어교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세종사이버대학교 국제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관성 李灌成, Lee Kwan-sung

곡부서당에서 서암 김희진 선생에게 한문을 배웠다. 현재 퇴계학연구원에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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