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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견시집주 12
저자 황정견 역자/편자 박종훈, 박민정, 이관성
발행일 2024-08-15
ISBN 979-11-5905-926-1 (94820)
쪽수 340
판형 152*223 양장
가격 2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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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다운 시가 시대, 그 중심에 있던 황정견

송나라는 개국(開國) 왕조인 태조부터 인종조(仁宗朝)를 거치면서 만당(晩唐)·오대(五代)의 장기간 혼란했던 국면이 정리되어 나라가 안정되었고, 백성들의 생활환경 또한 비교적 안정을 찾게 되었다. 전대(前代)의 가혹했던 정세가 완화됨에 따라 농업이 급속도로 발달하였고, 안정된 농업의 경제적 기초 위에서 상공업이 번창하고, 번화한 도시가 등장하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전대에 비해 상당한 풍요를 구가하게 되었다. 이처럼 사회 전체가 안정되고 발전함에 따라 일반 백성들은 단조로운 것보다 복잡하고 화려한 것을 추구하게 되었다. 시대적·사회적 환경은 곧 문학 출현의 배경이고, 문학은 사회생활이 반영된 예술이라고 할 만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유협(劉勰)이 “문학의 변천은 사회 정황에 따르다[文變染乎世情, 興廢繫乎時序]”고 한 것처럼, 사회의 각종 요인은 문학적 현상을 결정하기 때문에 이러한 요소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문학 풍조의 변혁을 동반한다. 송초 시체(詩體)의 변천은 이러한 사실을 보여주는 객관적인 증거이다. 특히 송대에는 일찍부터 학문이 중시되었다. 이는 주로 군주들의 독서열과 학문 제창으로 하나의 사회적 풍조로 자리 잡게 되어 송대의 중문중학(重文重學)적 분위기가 마련되었다. 

황정견은 바로 이때 전성기를 구가하여 북송(北宋)을 대표하는 시인이다. 중국시가의 최고 전성기라 할 수 있는 당대(唐代)를 뒤이어 등장한 북송의 시인들에게는 당시에서 벗어난 송시만의 특징을 만들어 내야 하는 일종의 숙명이 있었다. 이러한 숙명은 북송 초 서곤체에 의해 시도되었으며 북송 중기에 이르러 비로소 송시다운 시가 시대를 풍미하기에 이르렀다. 황정견이 그 중심에 있었다. 

 

후대까지 영향을 미친 황정견의 시론

황정견은 시를 지을 때 시의 표현을 다지고 시법을 엄격히 지켜 한 마디 한 글자도 가벼이 쓰지 않았다. 황정견은 수많은 대가들을 본받으려고 했지만, 그중에서도 두보(杜甫)를 가장 존중했다. 황정견은 두보 시의 예술적인 성취나 사회시(社會詩) 같은 내용 측면에서의 계승보다는, 엄정한 시율과 교묘(巧妙)한 표현 등 시의 형식적 측면을 본받으려 했다. 황정견 시론의 요점을 정리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시의 조구법(造句法)으로서의 환골법(換骨法)과 탈태법(奪胎法)이다. 이에 대해 황정견은 “시의 의미는 무궁한데 사람의 재주는 한계가 있다. 한계가 있는 재주로 무궁한 의미를 좇으려고 하니, 비록 도잠과 두보라고 하더라도 공교롭기 어렵다. 원시의 의미를 바꾸지 않고 그 시어를 짓는 것을 환골법이라고 하고, 원시의 의미를 본떠서 형용하는 것을 탈태법이라고 한다[詩意無窮, 而人才有限. 以有限之才, 追無窮之意, 雖淵明少陵, 不得工也. 不易其意而造其語, 謂之換骨法. 規摹其意而形容之, 謂之奪胎法]”(『시인옥설(詩人玉屑)』)라고 한 바 있다. 이로 보건대, 황정견이 언급한 환골법은 의경을 유사하게 하면서 어휘만 조금 바꾼 것을 일컫고, 탈태법은 의경을 변형하여 사용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진부한 표현이나 속된 말을 배척하고 특이한 말과 기이한 표현을 추구했다. 구체적으로는 술어를 중심으로 평이한 글자를 기이하게 단련(鍛鍊)시켰고 조자(助字)의 사용에 힘을 특히 기울였으며, 매우 궁벽하고 어려운 글자를 사용했고 기이한 풍격을 형성하기 위해 전대(前代) 시에서 잘 쓰지 않던 비속(非俗)한 표현을 시어로 구사하여 참신한 의경을 만들어내곤 했다. 

셋째, 전고(典故)의 정밀한 사용을 추구했다. 이는 황정견 시론의 “한 글자도 유래가 없는 것은 없다[無一字無來處]”와 연관된다. 강서시파는 독서를 중시했는데, 이것은 구법의 차원에서 전대 시의 장점을 수용하기 위한 것이지만, 이는 전고의 교묘(巧妙)한 활용이라는 결과로 표현되기도 했다. 그러면서 전인의 전고를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자신의 의도에 맞게 변용했다.

이와 같은 황정견의 창작법에 대해 부정적 평가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 평가는 황정견 시의 파급력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황정견을 중심으로 한 강서시파가 당대(當代)는 물론 후대 및 조선의 문인들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황정견의 시를 세밀히 소개하다

황정견은 현존하는 가장 공신력 있는 중화서국(中華書局)본에 따르면 총 1,916수의 시 작품을 남겼다. 북경(北京) 중화서국(中華書局)에서 2007년에 출간한 전 5책의 『황정견시집주』에는 총 1,260제(題) 1,916수(首)의 시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황정견 작품의 구절 및 시어(詩語) 하나하나가 갖는 전례와 창작배경 그리고 구절의 의미 및 전체적인 의미를 상세하게 주석을 통해 소개해, 황정견 작품의 세밀한 이해를 돕고 있다. 이 책에서는 『황정견시집주』에 소개된 모든 주석을 꼼꼼하게 번역하였으며, 주석의 내용을 시의 자구(字句) 해석에 최대한 반영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황정견 시가 워낙 난해하여, 경우에 따라서는 주석이 시 본문과 어떤 연계성이 있는지조차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이러한 경우에도 연결 관계를 최대한 찾아 시 본문 번역에 녹여내고자 노력하였다.

황정견에 대한 연구는 지금까지 꾸준히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아직까지 황정견 시 작품에 대한 전체적인 번역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구체적인 실상의 일면만을 위주로 하거나 혹은 피상적으로 연구가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이에 상세한 주석을 통해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돕는 『황정견시집주』에 대한 완역은, 부족하나마 후학들에게 황정견 시를 이해하기 위한 초석을 다지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해제

황진시집주서

 

황정견시집주

산곡별집시주

산곡별집시주권상(山谷別集詩注卷上)

1. 염계시【서문을 함께 싣다. 이편은 전집에 이미 실려 있다】(濓溪詩【幷序. 此篇前集已載】)

2. 목동(牧童)

3. 과거 보러 가는 사람을 전송하다(送人赴擧)

4. 사심 상서 아우의 돌에(嗣深尙書弟晬日)

5. 「사안전」을 읽고서(讀謝安傳)

6. 이모 숭덕군에게 장수의 술을 따르다(酌姨母崇徳君夀酒)

7. 오개부의 번라오에 감사하다(謝五開府番羅襖)

8. 잡가(雜吟)

9. 해당화(海棠)

10. 압사사의 배꽃(壓沙寺梨花)

11. 「조추우중」에 화답하여 정회를 읊어 장등주에게 드리다(和早秋雨中書懐呈張鄧州)

12. 절구(絶句)

13. 임하로 가는 도중에(臨河道中)

14. 범렴에 화운하다(和范廉)

15. 외삼촌 이공택을 따라 장차 경보에 이르러 강남으로 돌아가려 하였는데, 애당초 회수의 서쪽에서 아직 가을이 되기 전에 돌아갈 생각을 하였다(從舅氏李公擇 將扺京輔以歸江南 初自淮之西 猶未秋日思歸)

16. 다음날 비에 막혀 앞 시에 차운하다(翌日阻雨次前韻)

17. 오로정【서문을 함께 싣다】(五老亭【幷序】)

18. 여홍범의 시에 화답하다(答余洪範)

19. 곧바로 오다(卽來)

20. 고도에게 받들어 답하다(奉答固道)

21. 성사가 『논어장구』를 강론하며 지은 시에 받들어 화답하다(奉答聖思講論語長句)

22. 학해사에 쓰다(題學海寺)

23. 매화(梅花)

24. 태화 남탑사의 벽에 쓰다(題太和南塔寺壁)

25. 군용이 보내온 「별시절구」에 화답하다(和答君庸見寄別時絶句)

26. 유사주에게 보내다(寄劉泗州)

27. 평원의 군재에서. 2수(平原郡齋. 二首)

28. 형돈부의 부채에 쓰다(題邢惇夫扇)

29. 절구를 지어 초화보에 주다(絶句贈初和甫)

30. 청허와 함께 이원을 방문하면서 청허의 시에 차운하다(次韻淸虛同訪李園)

31. 청허의 시에 차운하다(次韻淸虛)

32. 청허가 자첨이 상주의 수령이 된 것을 기뻐한 시에 차운하다(次韻淸虛喜子瞻得常州)

33. 공병, 자유가 16일 밤에 청허를 그리며 지은 시에 차운하다(次韻公秉子由十六夜憶淸虛)

34. 조군거를 방문하다(訪趙君擧)

35. 왕명지의 「눈」에 화답하다(和王明之雪)

36. 자첨의 묵죽에 제하다(題子瞻墨竹)

 

산곡별집시주권하(山谷別集詩注卷下)

1. 소자미가 비각의 벽에 쓴 시와 환관 장후 집의 19장의 종이에 쓰여진 묵적을 보고 동료 전재옹 학사와 함께 짓다(觀秘閣蘇子美題壁及中人張侯家墨跡十九紙率同舍錢才翁學士賦之)

2. 문로공 「황하의」 뒤에 제하다(題文路公黄河議後)

3. 종실 대년의 그림에 제하다(題宗室大年畫)

4. 연저 양천공 양호당의 그림에 제하다(題燕邸洋川公養浩堂畫)

5. 유법직의 시권에 제하다(題劉法直詩卷)

6. 벼슬을 그만두고 호주로 돌아가는 막 낭중을 전송하다【병인】(送莫郎中致仕歸湖州【幷引】)

7. 잡시(雜詩)

8. 명숙이 고맙게도 두 게송을 보여주기에(明叔恵示二頌)

9. 검남 수령 장무종에게 주다(與黔倅張茂宗)

10. 임도와 눈 내리는 동고에서 노닐며 그가 지은 차운하다 (次韻任道雪中同遊東臯之作)

11. 장난삼아 원상인 차군헌에 제한 시운을 써서 시를 지어 주언이 나를 깨우친 작품의 ‘병든 눈이 어지럽다’는 구에 답하였는데, 격률에 미치지 못하고 글자도 형편없다(戲用題元上人此君軒詩韻奉答周彦起予之作病眼空花句不及律書不成字)

12. 포태형의 시에 화운하다. 4수(和蒲泰亨. 四首)

13. 태형이 술을 보내준 것에 대해 사례하다(奉謝泰亨送酒)

14. 동파가 중천황, 왕원직에게 보낸 육언시에 화운하다(和東坡送仲天貺王元直六言韻)

15. 원사가 영주에서 와서 노주 강안 면수역에 있는 나에게 뒤미처 시를 보냈다. 인하여 예전에 지었던 「차군헌」 시의 운자를 사용하여 지어주면서, 아울려 원사의 법제인 주언공(王庠)에게 편지 삼아 드리다(元師自榮州來 追送余於瀘之江安綿水驛 因復用舊所賦此君軒詩韻贈之 竝簡元師法弟周彦 公)

16. 목귀정에 시를 남기다(木龜亭留題)

17. 나공산의 고백암에 제하다(題羅公山古柏庵)

18. 동파가 그린 곽공보의 벽상 묵죽에 쓰다(書東坡畫郭功父壁上墨竹)

19. 천휴 사중산의 만사(史天休中散挽詞)

20. 송부인 만사(宋夫人挽詞)

21. 법륜 제공에게 주다(贈法輪齊公)

22. 성지에게 주는 글과 시 두 편【인을 함께 싣다】(與成之書並二詩【幷引】)

23. 이양공 집에 보관되어 있는 주방이 그린 미인금완도에 제하다(題李亮功家周昉畫美人琴阮圖)

24. 신중이 멀리서 와서 나를 방문하고 또한 올해의 새 차를 주었다. 또한 신도가 아름다운 시편을 보내주기에 다시 차운하여 신중에게 올리고 아울러 신도에게 편지 삼아 보내다(信中遠來相訪 且致今歲新茗 又枉任道寄佳篇 復次韻呈信中兼簡任道)

25. 유자옥의 관사에 화운하다. 10수(和柳子玉官舍. 十首)

양수경 「산곡시집주」 발문(楊守敬跋山谷詩集注)


저자

황정견/ 북송(北宋)을 대표하는 시인


역자

박종훈 朴鍾勳, Park Chong-hoon

지곡서당(芝谷書堂)에서 한학(漢學)을 연수했으며, 조선대학교 국어국문학부(고전번역전공)에 재직 중이다.

박민정 朴玟貞, Park Min-jung

고려대학교에서 중국고전시 박사학위를, 중국저장대학(浙江大學)에서 대외한어교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세종사이버대학교 국제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관성 李灌成, Lee Kwan-sung

곡부서당에서 서암 김희진 선생에게 한문을 배웠다. 현재 퇴계학연구원에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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